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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젠더는 패러디다』 조현준 (현암사, 2014)


젠더는 패러디다 - 8점
조현준 지음/현암사


쩌면 버러가 쓴 『젠더 트러블』의 결론 <패러디에서 정치성으로>에서 따온 제목일까. 그러나 버틀러는 앞의 책에서 결론에 다다르기 전 이미 젠더 연기(performance)에 대해 말했다. 현재 우리는 중요한 육체성에 관한 세 가지 우연적 차원에 직면해 있는데, 바로 섹스와 젠더 정체성 그리고 젠더 연기라고 말이다. 책에서 젠더 패러디는 이렇게 정의된다. 패러디되는 원본이 제도와 규범으로 만들어진 이상성에서 기인한다면 결국 패러디는 원본이 아닌 특정 관념을 모방하는 것이 된다고(이 시점에서 벌써 원본과 모방본의 구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젠더 패러디는 젠더가 그 양식에 따라 스스로 형태를 갖추는, 원래의 정체성 자체가 원본 없는 모방본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사실상, 그 효과로 인해 모방본의 위상을 띠게 되는 생산물이라는 것이다.」(앞의 책) 그녀에 의하면 '사람'이란 '젠더의 인식 가능성(gender intelligibility)'이라는 합의된 기준에 따라 젠더가 될 때에만 비로소 파악되기 때문에,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젠더 정체성 논의에 앞서서는 행해질 수 없다. 정체성이라는 것이 특질이 아닌 규범적 이상이며 담론적 관행의 결과라면(물론 그럴 수 있다, 아니면 이미 그렇게 되었거나), 당연하게도 논의는 더욱 더 복잡한 스펙트럼을 향해 간다. '남성'과 '남성다움', '여성'과 '여성다움'은 '나와 너'만큼 다르다.



젠더는 섹스라는 상위 카테고리 아래에 있는가? 다시 말해 젠더는 섹스의 규제를 받고 있는가? 사실 나는 버틀러의 논의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성 정체성'이라는 묘한 꼬리의 폭력성에만큼은 단순한 익살스러움 이상의 거부감을 느낀다. 성 정체성과 젠더가 한데 묶여(혹은 동일시되어) 펼쳐지는 살풍경들은 '배제당하는 삶'으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사람이 반드시 여성다움을 지녀야 한다거나 페니스 달린 남성이 반드시 남성다워야 한다는 생각에는 나는 이미 저쪽 건너편에 있다(여성과 남성에 '다움'을 붙이는 것도 여기서는 조심스러워진다). 버틀러는 섹스와 젠더를 모두 같은 젠더라 주장하지만, (만약) 섹스(생물학적 몸의 차이)와 젠더(문화적, 사회적인 동일시 양식)로 구분하게 된다면ㅡ 그런 상태에서 보편적 합리성이라는 말을 갖다 붙여 섹스의 다양성과 젠더의 다양성을 일치시킬 수만은 없다(페미니즘이 때로는 정당하지 못한 얼굴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시에 남성과 여성을 주체와 타자로 놓을 수도 없다. 정말 섹스와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를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을까? (언제나) 명확하게 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리기에도, 버틀러를 읽기에도 곤란한 처지에 놓인다. 또 헤게모니의 질서라는 것이 의심스러워지고 내부와 외부/중심과 주변의 논리에 입각해 정체성/정체성들을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저울의 한 편 위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버틀러(를 포함한 페미니즘 일반)를 정의하는 것에도 많은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심지어 '페미니즘'이 반드시 여성이라는 집단적 범주를 가정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뒤따라온다면 더욱 곤란한 것이다ㅡ 말 그대로 '트러블'이다. 그러므로 안티고네가 여성/여성다움을 대표하는지 어떤지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아니면 영원히 알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몸의 구멍과 요철이 주는 혼돈스러움에서 젠더라는 기표를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덧) 만약 『젠더 트러블』 읽기에 실패했다면 '주디스 버틀러 읽기'에 해당하는 이 책으로 대신할 수 있을 테지만, 어쨌거나 이것은 버틀러를 개괄하는 데 의미가 있으므로 다시 그녀의 책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