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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레트로 마니아』 사이먼 레이놀즈 (작업실유령, 2014)


레트로 마니아 - 10점
사이먼 레이놀즈 지음, 최성민.함영준 옮김/작업실유령


트로가 느슨한 용법으로 정의 내려져 사용되는 현상(반드시 그렇다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은 꼴사납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또 낡아 보이기도 하고, 또 친숙/편안하기도 하다. 추억 팔이(재탕)냐 재해석이냐 하는 건 자정(自淨)될 수 있다고 본다. 뭐든지 극에 달하면 순환과 여과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과거, 회귀, 추억, 회상 등의 측면으로 보자면 '옛것'의 쓰임새는 상당히 다종다양해진 동시에 여러 방면으로 흘러넘친다. 이를테면 광고음악으로 7, 80년대 음악을 차용해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든지, 예전의 향수를 자극할 심산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흥행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든지ㅡ 아니면 대놓고 과거를 외친다거나 하면서 말이다('응답하라!'). 어정버정한 라이브 실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맨밴드 코넬리우(어)스(Cornelius)의 앨범을(《Fantasma》와 《69/96》 거의 이 두 장뿐이었지만) 줄기차게 들었던 때가 있었다. 특히 「Brazil」을 들으면 아기자기한 안락함보다는 영화가 먼저 떠올라 서둘러 멈추곤 했지만, 시부야계로 표현되는 폭넓은 요소 ㅡ 당연히 레트로도 포함된다 ㅡ 로 인해 다채롭게 '믹스'된 음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덧붙여 일본 음반 시장이 정말 부러운 것은 '일본반 보너스트랙'이 따로 있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흥미가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 키노코 호텔[キノコホテル]을 듣기도 했지만 일본 쪽도 어딘지 모르게 옛날 같지는 않다ㅡ 멤버들의 헤어스타일이 죄다 버섯[키노코; 버섯] 모양이다.)



또 당시에는 카세트테이프를 듣던 때여서(지금도 집에 모셔져 있어서 이따금 도미노를 만들기도 한다) 공 테이프를 구입해 이리저리 녹음을 하며 가지고 놀기도 했다. 심지어 그것은 윗부분의 구멍을 막으면 재녹음도 가능한 마법의 물건이었다. 적어도 CD-R, CD-RW가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특히 라디오가 들려주는 음악, 대개 <골든디스크>나 <음악캠프>가 주를 이루었는데, DJ가 음악 자체를 틀어주지 않거나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하면 넋이 나간 듯 앉아있어야만 했다. 언제 어느 채널에서 내가 원하는 노래가 나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지금은 많이 사라진 레코드숍에 공 테이프를 가져가 약간의 돈을 얹어주고 듣고 싶은 팝 리스트를 건넨 후 다음 날 재방문을 하면 따끈따끈하게 녹음된 결과물을 얻어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소위 주옥같은 멜로디는 이미 나올 만큼 다 나왔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그렇기 때문에 음악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음악 기술이나 장비 역시 그때의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만 같다.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미국 패권주의의 상징인 영화 《아마겟돈》을 보면 우스우면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우주로 떠나기 전 굴착 전문가 해리의 팀원인 맥스가 NASA 국장에게 위험천만한 임무 수행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저 옛날 게임팩처럼 생긴) 8트랙 테이프의 부활이었다.



과거 일상의 지루함을 달랬던 것은 책이나 잡지, 음반이 고작이었는데, ㅡ 내가 80년대 태생이니 그 이전의 것들을 광범위하게 언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ㅡ 레이놀즈에 의하면 오늘날의 지루함은 다르다. 그 성격은 과포화 상태, 주의 분산, 쉴 새 없음과 연관되는데, 그 이유는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수천 개의 텔레비전 채널, 무수히 많은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 미처 듣지 않은 앨범과 보지 않은 DVD, 읽지 않은 책, 미로처럼 끝없는 유튜브(mp3 불법 복제에 관해 언급했던 마이클 잭슨의 반응이 생각난다)의 아(나)카이브……. 그가 말하는 지금의 지루함이란 결핍에 대한 반응, 관심과 시간을 요구하는 과잉에 대한 반응, 문화적 식욕 상실이다.(p.96) 어쨌건 그래서인지 별다른 새로운 것 없이 2000년대 들어 과거를 끄집어내는 작업들은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21세기가 전 세기의 과거로 북적이고 있는 거다(과연 레트로를 힙스터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아니면 포함관계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빈티지라는 리브랜딩은 여전히 성업 중인데 아카이브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만물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그간의 쓸 만한 재료가 많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으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쓸 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한편에서는 카드처럼 '돌려막기' 기술을 펼치지 않으면 레트로는 무의미하게 된다.







레이놀즈가 이야기를 시작하며 21세기 첫 10년을 두고 '재(re)' 시대였다고 털어놓은 것은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발매, 재조명, 재결합, 재활용, 재해석, 재조합…… 재탕. 이것은 단순히 몰개성의 발현이라고만은 단정할 수 없다. 어쨌든 그것들을 (완전하지는 않은) 새로운 결과물이라 봐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싫은 건 이런 경우다. 수십 년 지난 앨범들에서 이것저것 끌어와 별로 들을만한 게 없는 '박스 세트'를 만들고, 먼지 쌓인 고전 멜로디를 찾아 피치만 올려 샘플링하고, 아니면 아예 리메이크나 패스티시를 통해 [재]인용을 하면서 원작을 망가뜨리는 것 등. 개중에는 정말 레트로를 향유하려 한다기보다는 현재에 맞서 개성을 부각시키려는 자들도 있다.) 전적으로 내 취향에 근거하자면 스트록스나 화이트 스트라입스(래콘터스), 카이저 칩스는 그런 면에서 아슬아슬한 편이다ㅡ 특히 스트록스의 《Angles》는 언급 자체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이고(결국엔 말하고 말았지만). 하여간 스미스 요원처럼 복제의 복제의 복제를 감행해 단순히 '과거 채굴꾼'이 되어서는 버텨낼 수 없다. 아무리 기존의 것을 불러와(혹은 몇십 년 전의 냄새가 나도록 꾸며) 사용한다 하더라도 수용자가 납득할만한 물건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지, 유명해지기도 전에 똥을 싸는 자들이 판을 치면 안 되는 거다ㅡ 「유명해져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것이다(Be famous, and the will give you tremendous applause when you are actually pooping[앤디 워홀]).」



다시 말해 어떤 의미로는ㅡ 2000년대의 소리 풍경을 돌이켜보면 결정적인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장르 대부분은 평형 상태에 안주한 채, 좋게 말하면 완만하고 솔직히 말하면 알아챌 수도 없으리만치 느린 속도로 진화했으며, 오늘날 활동가 대부분은 오래전 선조들이 거둔 성과를 팔아먹고 있는 거다.(p.384-385) '바로 전 유행에서만 벗어나는 유행' 열풍이랄까. 물론 레트로 자체를 싸잡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과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것이라는 망토를 두르고 나와도 쉽게 싫증나는 유행과 그런 조급함이 문제일까(드럼앤베이스와 덥스텝의 사양길[이라 표현해 미안하지만]은 얼마나 빨랐던가)? 그런가하면 개인적이고 지역적인 음악이 (특히 한국에서) 뿌리내리기란 얼마나 힘든가? 너바나와 스매싱 펌킨스는 대체 언제까지 득세할 것인가? 더군다나 지금은 '과거의 복고'와 '현재의 복고'를 구분해야하기까지 할 판국이며 ㅡ 레트로도 결국엔 과거의 재방문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ㅡ 문화의 다음 단계를 밝히겠다는 소망은 슬프게도 망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덧) 조지 오웰의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학식이 풍부하지만 정신을 과거에 놔두고 온 포티어스라는 인물은 말한다. 「이 친구야!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네.」


사족) 문득 떠오른 건데, 이언 커티스도 2년만 참았으면 그 시대 반항아들처럼 스물일곱이 되어 멋지게 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죽음’마저도 레트로 문화에 넣자는 것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