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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좌파가 알아야 할 것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획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


좌파가 알아야 할 것들 - 10점
세르주 알리미 외 32인 지음, 이진홍 옮김/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리스의 시리자(급진좌파연합)가 집권하고 각각의 상반된 시선이 쏟아졌다. 기존의 정치세력과 기득권층으로 이루어진 질서를 거부한 유권자의 승리로 보는가하면 다른 한편에선 시리자의 집권을 신민당에 느낀 피로감에서 찾으며 앞으로 그리스의 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라 평했다. 글쎄, 모르겠다. 우리가 여태 정의하고 있는 진보 혹은 좌(左)의 의미가 과격, 반(反)자본, 운동권 등으로 점철되었던 만큼 한국정치에서의 진보는 다른 국가들에서와 다소 다른 양상을 띤다. 한국 보수가 '잃어버린 10년'으로 칭하는 시절도, 나는 얄궂게도 그것이 진보정치였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설령 한국정치가 좌우로 나뉘어있다 한들 아시모프가 『파운데이션』에서 역설했던 '(그럼에도 불구한)끝없는 노력'은 어디에도 없고, 이념이 아닌 현실의 손을 들어주어도 모자랄 마당에 정치공학 운운하며 악다구니를 써 봐야 별무소용이다ㅡ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특기할만한 점 두 가지, 좌파와 우파라는 단어는 진보와 보수라는 단어보다 굉장히 파렴치하고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있는 것과 동시에, 꾸준히 좌파와 진보가 기를 펴지 못해왔던 것에 비해 최근 들어 '보수 =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는 것. 어쨌든 한국정치에서의 진보는 개혁, 자율, 민주, 평등, 자유 등에 관한 한 자신들의 담론을 보수의 그것에서 베끼는 수준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에 진보는 없다. 급진적이라는 말은 그저 '급진적 선회'에만 쓰였고 자율 역시 '시장의 자율'에 그쳤으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과 인식을 함께해 줄 담화가 사라지는 것을 목도해야만 한다. 대중이 길을 잘못 들었는가, 아니면 정치가 잘못된 길로만 가는 건가.




진보적 정치 이념과 지향성을 하나의 점으로 규정하려 들면, 각자 생각하는 정답을 각자가 주장하기만 할 뿐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지점을 이내 만나게 된다 (...) '소인은 똑같은 자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상태인 것이다.


본문 p.303 「우리가 진실로 진보정치를 원한다면」에서



18세기의 사상가 콩도르세는 프랑스 혁명에 걸린 가장 큰 위험은 구제도인 앙시엥 레짐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계급이 민주주의를 횡령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대담하고 야망 있고 이기적인 한 부유한 계층이 자기들만의 지배로 민주주의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계층이 아니라 국가에서 스스로 모집된 것으로 국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자기들이 대표하는 국가의 이익이 곧 자신들의 이익과 동일하다는 근거로 국가가 스스로를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보다 자신들이 더 잘 대변하고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본문 3부 中 「그들은 누구를 대표하는 걸까?」에서) 무슨 무슨 '주의'를 들먹이기에는 진보건 보수건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다. 특히 좌파의 정체성의 위기는 꽤나 심각한데, (제발 그 빌어먹을 '통합'이란 단어를 좀 갖다 붙이지 않았으면!) 대중과의 연대감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그들 스스로 분열해버린다. 왜 그들은 늘 불가피하다는 볼멘소리를 하는가? 왜 그들은 늘 불완전하다며 징징대는가? 질질 짜기 전부터,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패배감으로 똘똘 뭉쳐있는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건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항상 마취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2년 전쯤 <마니에르 드 부아> 124호에 수록된 「그리스 급진좌파연합 시리자당의 운명」(본문 수록)에서는 이런 문장도 찾을 수 있다. 「이제 노동자, 피고용인,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간계층을 결집한 거대당이 되어버린 시리자당은 공산당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것만큼이나 거대 미디어와 그 충견(忠犬)들도 불편하게 한다.」(p.202) 진보이건 좌파이건 대중은 그들에게 역시 일관성을 요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대중은 그들이 단순히 정체되어있는 현상이나 특권층에게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만을, 위의 인용에서처럼 불편하게 만드는 것만을, 바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