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_롱

『심리정치』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5)


심리정치 - 8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 놓았더니 / 잡지에서는 예쁜 것만, 신문에서는 거짓말만, 텔레비전은 웃긴 것만, 학교에서는 영어 수업만…….」 좋아하는 뮤지션의 어느 노랫말인데 실은 '/' 앞과 뒤로 나뉜 부분은 서로 자리 바꾸기를 해야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병철에겐 자유가 성공적 공동체와 동의어이고, 그 성공적인 공동체 즉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은 거꾸로 강제적이다. 그러니까 자유가 강제를 초래한다는 거다. 정치가와 정당이 수동적 시민(소비자)에 대해 상품을 제공하는 납품업자가 되고 자유에 경쟁과 눈가림이 간섭하면, 해방되는 것은 자유로워야 할 시민이 아니라 자본이며 그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변모하는 이유에서다.(p.13) 엊저녁 우연찮게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본 드라마에서 아들이 물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뭐냐고. 아버지는 말한다. 남이 이렇게 살아줬으면 좋겠다싶은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생긴 대로 사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것, 그렇게 살아도 안 혼나는 것, 이라고. 당연히 그렇다. 자유가 진정 자유롭도록 느끼는 '자유의 유한한 테두리'가 설치되어 있으니 그 안에서라면 아무리 자유로워도 나는 꾸짖음을 당하지 않는다. 즐거이 춤이라도 추어야 할 것만 같은 제목의 영화 《브라질》에서 흘러나오는 말랑말랑하고 흥겨운 음악처럼 마음껏 살아도 된다. 단 '브라질'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이런 규율 속에서 나는 누군가로부터 두들겨 맞지 않고 조용히 통조림 속에 욱여넣어져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거다. 많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잡지가 다른 어떤 인물보다도 예쁜 소녀의 얼굴, 즉 독자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예쁘면서도 독자들이 충분히 받아들일 정도로 순결한 소녀의 얼굴을 표지 모델로 선호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월터 리프먼 『여론』) 한병철이 [신자유주의 = 좋아요-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뭔가? 한마디로 '자유로운 결정'이란 미리 정해진 가능성들에 대한 선택으로 전락했기 때문인데, 과도한 긍정성으로 무장한 채 인간을 금지(억압) 대신 유혹(친절)으로 낚시질하며 살금살금 꾀고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다투고 실랑이하며 물어뜯을 것이 도처에 널려 피곤한데도 나는 나 자신과 다시 한 번 드잡이를 해야 한다. '성공적 공동체'라고 착각하는 곳에서도, 동시에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데이터 속에서도. 「페이스북 같은 디지털 봉건 영주들은 우리에게 땅을 주며 말한다. 경작해라, 공짜로 주겠다. 그리고 우리는 미친 듯이 경작한다. 결국 수확을 걷어가는 건 봉건 영주들이며 이것은 소통의 착취다.」(<강렬한 시대 비판자 한병철을 만나다> 『심리정치』 부록) 짐승들 중에도 사로잡히면 곧바로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을 떠나면 죽고 마는 물고기처럼, 마찬가지로 짐승들도 세상을 버리고 눈을 감는다. 천부의 자유 상태를 빼앗긴 후에는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에티엔 드 라 보에시 『자발적 복종』) 그러나 나는 이성이 있는 인간이다. 하여 한병철의 말대로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인 양 살아간다. 이런 성과주체는 ‘절대적 노예’이다. 나를 보듬고 허용해주며 장려하여 내가 나 자신을 고문해 용이한 감시가 가능토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