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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민음사, 2000)

고도를 기다리며 - 8점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없이 늘어난 용수철 같다. 아니면 황당할 정도로 무뎌져 쓸모없게 돼버린 날붙이이거나. 보이지 않는 거센 공기는 가까이 오는 자를 멀리 보내고 멀리 있는 자를 이쪽으로 떠밀며 그런 식으로 이리저리 찢기다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베케트가 무슨 술수를 부렸든 간에 바둑판 위 인간들은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게 된다(블라디미르의 대사). 처음부터 얻어맞은 채 등장하는 에스트라공은 누군가에게 당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블라디미르는 모자를 만지고 두드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럭키의 목줄을 쥔 포조는 2막 이후 왜인지 장님이 되어 이번엔 럭키에게 이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는데다가, 단 두 번의 대사밖엔 없지만 '생각해!'라는 명령에 따라 무자비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럭키 그리고 대뜸 등장해 변죽만 울리는 소년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괴상한 소리만 하고 사라진다. 인물들은 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혼란스레 가져가는가? 그들은 왜 맷집을 뽐내며 떠들썩하게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가? 끝내는 험상궂은 몰매를 맞고 비틀린 미소를 짓게 될 뿐인데도 말이다. 원인은 베케트가 (고도로 하여금) 문제만 내놓은 채 해결책 없이 사라진 탓으로, 같은 대사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 더치고 더칠수록 이 희곡은 점점 비극적으로 보이기만 한다. 더욱이 작품의 맨 마지막은 '그럼 갈까' 하고 블라디미르가 묻고 '가자' 하며 에스트라공이 대답하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에는 지문이 하나 붙어 있는데 바로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이다. 가려 하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거다. 그런가하면 1막에서 생각하라는 포조의 명령에 맞추어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 럭키는 쉬지 않고 단어들을 나열하기 시작하는데, 포조는 그의 모자를 빼앗아 바닥에 내던지고 짓밟은 뒤 '이래야 다시는 생각을 못하지!'라며 분통을 터뜨린다ㅡ[생각해! vs 생각하지 마!] 도대체가 이쪽에 귀를 대면서도 저쪽을 바라보고, 저쪽의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정작 이편에 있는 것엔 무관심한 작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바로 인간이 그렇기 때문이며, 그런 까닭에서라도 저질스러운 정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