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 전선 이상 없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열린책들, 2009)

· 책_롱 2010. 10. 10. 10:49



작품의 의 배경이 된 세계대전이나, 세상의 모든 전쟁, 총싸움, 전쟁을 그린 영화나 책, 정치적 입장 등은 뒤로 놓고, 오직, 이 『서부 전선 이상 없다』만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강철 같은 청춘. 청춘이라!

우리는 모두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리다고? 청춘이라고? 그건 다 오래전의 일이다.
우리는 어느새 노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ㅡ 본문 p.22



정말 그들은 노인이 된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더 살고 싶다. 그들은 참호 안에서 느낀다. 시체의 영혼을 빨아들인 밤안개가 내일은 적의 포탄을 몰고 올거라는 것을. 그리고 바람을 타고 오는, 어딘가에 쓰러져 있는 아군 병사의 신음 소리를 듣는다. 왜 전쟁이 일어난 거지? 어째서 내가 여기서 총을 들고 있어야 하지? 대체 왜 땀으로 가득찬 군화를 벗지 못한 채 꼼짝않고 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쥐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기 전에 그들은 악마가 된다. 그들은 어린아이가 되고 피상적으로 변한다. 알싸한 연기를 맡으며 그들은 웅크린 맹수가 되고 교착 상태에 빠진 인형이 된다. 그들은 사자(死者)가 되어서 움씰움씰 춤을 추는 기관총이 되고 또 수류탄이 된다. 부상병의 신음 소리를 싣고 오던 바람은 이제 피냄새를 데리고 오며 천진난만한(했던) 소년들에게 메스꺼움을 준다. 그들은 때로는, 부조리하다고 느껴지는 히멜슈토스 하사에게 침대 시트를 뒤집어씌워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패기도 하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사나운 개와 상대하면서도 거위 한 마리와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시간이란 이미 사라졌다. 두개골이 없어도 살아 있는 사람과, 두 다리를 잃은 채 달리는 병사와, 흘러내리는 창자를 움켜잡은 채 치료소까지 오는 병사를 본다. 그들은 '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입 안에 떠 넣고는, 달리고, 던지고, 쏘고, 죽이고, 널브러져 누워 있다.'(p.110). 그리고 그들은 어느 판자벽 광고물에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있는 한 소녀를 보고, 평화를 본다. 그리고는 곧 눈을 내려 자신들의 더럽고 꿰맨 자국이 있는 군복을 본다. 그리고 다시금 가슴에 총알 하나가 알을 슨다.




그냥 엎드리고 있으면 공포는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곰곰 생각하다가는 공포에 질려 죽고 만다.

ㅡ 본문 p.114



파울 보이머는 휴가를 나와서야 비로소 전쟁이란 것을 안다. 그가 전선에 있을 때는 활기를 띠기도 하고, 고독하기도 했다. 그가 휴가를 나와 어색해하고 혼자 있고 싶어할 때는 나 또한 그러했다. 병영에 있는 미텔슈테트가, 그에게 낙제를 줬던 칸토레크 선생에게 ㅡ 그는 이제 향토 방위대에 편입되어 미텔슈테트의 아래에 있다 ㅡ 잔소리를 해대는 것을 보고 히죽히죽 웃을 때는 나도 따라 히죽거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의 전쟁이란 누군가에게는 정치적 논쟁거리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흥미로운 가십거리일 뿐이란 거다. 우리의 파울 보이머(를 비롯한 모든 군인)는 참호 속에서 죽어가는 프랑스 병사로 인해 얼마나 고뇌했으며, 그의 지갑에서 발견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의 사진으로 얼마나 맹목적이게 되었는가. 결국 전우애는 허망함 그 자체로 돌변하고 그 속의 수많은 사연들은 총탄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날아간 것은 전쟁의 허망함과 어린 소년의 낡은 단추만이 아니다. 고약한 히멜슈토스 하사에게 대들던 차덴을, 몰래 잡은 거위를 요리하던 카친스키를, 포화 속에서 교과서를 끼고 다니던 뮐러를, 머리가 비상해 가장 먼저 일등병이 된 크로프를, 막상 전방에서는 겁에 질린 원숭이가 되어버린 히멜슈토스 하사를, 약혼자에게 보내겠다며 구리로 된 포탄 띠와 프랑스제 조명탄의 비단 낙하산 천을 줍던 하이에를, 휴가를 얻어 만난 부모님과 누나를, 그리고 참호 속에서 죽어간 제라드 뒤발이란 이름을 가진 프랑스 군인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마지막에, 작가의, 파울 보이머의, 그의 전우들의, 누군가의 나지막하고 담담한 외침을 듣는다.




온 전선이 쥐 죽은 듯 조용하고 평온하던 1918년 10월 어느 날
우리의 파울 보이머는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령부 보고서에는 이날 '서부 전선 이상 없음'이라고만 적혀 있을 따름이었다.

ㅡ 본문 p.229




posted by 아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