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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동물농장』 조지 오웰 (펭귄클래식, 2008)



시아의 스탈린은 언급하지 않아도, 그리고 그 상황과 들어맞고 있어도 『동물농장』은 자체로서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요소들을 충분히, 너무 많이 갖추고 있다 ㅡ 이야기는 진행되면서 계층이 나뉘고, 그 계층은 또 다른 단계로 구분되어진다. 혁명의 슬로건 아래 두 젊은 수퇘지 스노볼과 나폴레옹, 그리고 복서라는 말(바보스럽게 충성스런)로 표현되는 그들의 동물농장은 원초적인 불편함을 탐구하며 무서운 진실과 힘을 역설해준다 ㅡ 결말에서 돼지의 얼굴과 인간의 얼굴이 섞여지는 장면은 클라이맥스이자 새로운 동물농장의 출발이 된다. 또한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다수결이지만 그것은 무지의 다수이며(왜 '평화의 댐'이 떠오를까), 죽음을 앞둔 돼지 메이저의 꿈에서 시작되는 혁명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불쾌한 혁명이 되고 만다. 처음에 '영국의 동물'과 '일곱 계명', 지도자 돼지가 주최하는 '회의'는 동물농장 안의 '모든 동물의 안녕'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뒤에서, 기괴하게 뒤틀린 균형으로 형성되며 여러 동물들의 인물성으로 인해 더욱 놀랍게 드러난다. 특히 『동물농장』에서의 동물들은 저마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부여받고 있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동물은 바로 소리 없는 지식인으로 보여지는 당나귀 벤저민이다 ㅡ 그러나(그래서) 그는 계몽이라는 것에서는 좀 멀어 보인다. 이것은 '모두의 혁명'이 '그들만의 혁명'으로 변질되는 것을 가속화시킨다 ㅡ 갈까마귀 모지스 또한, 착취와 노동을 정당화하고 그것을 달래는 종교의 역할을 함으로써 동물농장이라는 하나의 체제를 멋지게 구성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기서 정작 중요한 건, ㅡ 내 생각엔(결론적으로) ㅡ 『동물농장』은 권력과 독재의 비난이 아니라 무지한 민중의 비판성이 더 강하다는 거다. 시력이 나빠진(이렇게 표현되는 상징성) 암말 클로버가 「일곱 계명이 예전과 마찬가지인가요, 벤저민?」 하고 묻는 장면은 얼마나 슬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