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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잠복』 마쓰모토 세이초 (모비딕, 2012)


잠복 - 10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학의 본질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누락되는 삶 역시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수녀의 일기처럼 순수했던 사람 하나가 웬일인지 범죄자가 된다. 가업을 이으려 착실히 반죽을 개던 선량하기만 한 메밀국수집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를 해한다는 식의(이유야 어쨌든 그런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는) 범죄. 동기는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거기서부터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경위가 애달프다. 고도의 경제 성장, 샐러리맨의 급증, 그에 따라 반듯하게 재단된 사회로부터의 사회적 배경과 인간의 정념이, 얼굴 뒤쪽 보이지 않는 손짓의 '거절하지 못할 제안'과 반응해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증명 시리즈'로 악명 높은(!)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는 이런 말을 했다. 「'세이초 이전'은 일반 독자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주로 고답한 문학이자, 문단의 칭찬 일색으로 독자의 선택을 강요하는 문단주도형 문학이었다. 하지만 세이초 작품은 독자가 주도했다.」 그런가하면, 세이초와 친했던 한 고서점 지배인이 언젠가 세이초의 입원 소식을 듣고 얼른 가보았더니 「병원은 심심해서 싫구만, 뭔가 재밌는 것 없을까」 하는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는 적도 있다고 한다.



어떤 작품이야 안 그러겠냐마는, 단편집 『잠복』은 모리무라 세이치의 말대로 독자가 주도하는, 한 사람이 파멸할 때까지 끝까지 가보는, 단편이라는 적은 용량임에도 최대의 중량감에 육박하는 초여름 백화만발(百花滿發)의 성과물이다 ㅡ 병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쯤 냉동인간으로 있다가 어느 병원에서라도 불쑥 나와 주면 어떨까. '재밌는 걸 좀 찾으러 왔다'고 하면서……. 『세이초와 그 시대(淸張とその時代)』, 『마쓰모토 세이초 사전(松本淸張事典)』 ㅡ 이런 책도 있군 ㅡ 등의 저자이면서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고하라 히로시(鄕原宏)는 세이초 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다. 어떤 작가가 어지간히 유명해지면 그 사람에 대한 책이 종종 출간되기도 하는데, 고하라 히로시가 쓴 책은 '사전'이다(앞의 책). 세이초의 작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등을 총망라한 책이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 사전』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였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다음은 고하라 히로시와, 전 아사히신문사 사장 나카에 도시타다(中江利忠)의 세이초에 대한 코멘트이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빼고는 일본 미스터리를 말할 수 없다.

ㅡ 고하라 히로시


이 대선배의 오랜 꿈은 자신의 작품의 무대가 된 곳곳을 아사히신문사 전용기를 타고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ㅡ 나카에 도시타다




나카에 도시타다의 말은 실현되었는데, 언젠가 제트기를 타고 운젠후겐산(雲仙普賢岳)의 화산 가스와 재가 날리는 분화구 근처에서 세이초가 흥분한 나머지 필름이 없는 것도 모른 채 셔터를 눌러대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어.」라며 '소년처럼' 분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각설하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ㅡ 이 단편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의 작품은 대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혹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을까?」 보다 「아아, 제길, 그럼 주인공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만은 제발!」 하는 기대와 불안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텍스트와 투쟁하거나 그것에 동화되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원망(願望)'하게 된다. 이를테면 「목소리」의 전화 교환원(다카하시 도모코)이나 「귀축」의 인쇄업자(다케나카 소키치)를 들 수 있겠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평안은 경사진 툰드라 평원의 짧은 여름보다도 더없이 적게 느껴진다. 한창 맛있게 피우고 있는 담배가 그대로 파국의 향(香)을 사르게 되는 꼴이다(도코모 씨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귀축」은 벅수 같은 ㅡ 창자를 찾아내기 힘든 게처럼 ㅡ 인물의 마음속에 똬리를 튼 무사안일로 인해 괴물로 변하는 모습을 그린다. 「목소리」의 경우는 갑작스레 장(章)이 바뀔 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시점의 변화 ㅡ 꼭 추리편과 해답편처럼, 혹은 밸린저(Bill S. Ballinger)식 컷백처럼 ㅡ 는 왕왕 독자로 하여금 괴로움에 가까운 불안한 추측에 더쳐 정신의 뒤집힌 앙양(昻揚)을 낳게 한다.



줄거리의 조밀함이란 측면에서는 「일 년 반만 기다려」와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를 꼽을 수 있겠다. 전자는 그야말로 카타스트로프의 정점을 찍는데, 여기서는 형사 소송법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와 함께 맞물린 유연한 '이야기의 그럴듯함'의 경첩이 주인공의 '계산 착오'를 씁쓸하게 만들고 있다.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는 한 지방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가 형사 내지는 탐정의 역할로 분(扮)해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이야기다.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가 편집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북스피어, 2009)에 달린 그녀의 해제는 이 작품을 두고 '끝까지 다 읽은 뒤 다시 한번 앞머리로 돌아와 읽어보라'고 조언한다(나도 그녀의 말에 따라 그렇게 해보았다). 그저 어둡고 무서울 뿐이었던 결말이 새삼 애달프게 변하리라 ㅡ 이 단편은 「얼굴」과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주인공들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 역시 묘한 조바심을 내게 된다. 「얼굴」에 대해 좀 키치적인 비유를 하자면, 통으로 된 아이스크림의 얄팍한 테두리처럼 긁어내면 긁어낼수록 자꾸만 녹아내려 종국에는 다 먹어치워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 무참한 행보랄까……(허허).



표제작 「잠복」은 내게는 최고의 단편이며 동시에 가장 뒷맛이 좋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화자의 입장이 되는 유키 형사는 세이초의 『짐승의 길』(북스피어, 2012)에서의 히사쓰네 형사처럼 자신이 쫓는 여자에게 동화되고 어느 정도의 감정선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일견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히사쓰네에게는 그 여자를 품으려는 일념이 있었고 또 그 과정에서 죽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유키 형사가 보여준 감정에는 이해와 연민이라는 명제가 끼어든다. 처음부터 그가 작심한 듯 쫓는 여자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이 여자, 수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유키 형사는 어찌된 일인지 '아갈묵념(!)'하고 만다. 그런가하면 「카르네아데스의 널」은 「일 년 반만 기다려」와 같은 맥락으로 형법의 '긴급 피난'이란 조건을 내세운다. 물론 앞의 단편처럼 안쓰러운 결말에서는 매한가지……라는 것은 찰나이며, 이미 등 뒤에서 시작된 오케스트라의 비극적인 연주에 맞춰, 이성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인간이 순간의 감정에 휘말리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18세가 되던 해 고쿠라의 작은 지방 신문사인 진서보(鎭西報)의 문을 두드렸다가 학력의 벽에 부닥치고 마는데 ㅡ 그러다 훗날 아사히신문사 규슈 지사가 사옥 신축을 계기로 고쿠라로 이전한 후 그곳에 취직한다. 그렇다면 왠지 수록작 「투영」은 그런 일면을 얼마간 반영한('투영'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이초 자신은 신문사의 꽃인 기자가 아니었기에 소설 속에서나마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게 아닐는지. 게다가 이 단편은 인간관계의 정(情)과 '정의는 승리한다'는 쾌감 또한 느낄 수 있어 다른 수록작에 비해 그나마 밝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다만 사건 발생 장치에 좀 무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대단한 작가라고 해서 어떤 장애나 의무감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그의 작품에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지 않아도 읽을 사람은 반드시 읽을 거라는 확신도 있고, 외려 칭찬 일색의 감상은 진정한 가치를 오도할 수도 있다는 추측뿐이다(그렇게 생각하는 주제에 잘도 이런 글을 쓰고 있군……). 단편집 『잠복』에서 우리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고 싶었던 배우, 티 없이 순수했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여인, 짐승처럼 제 자식을 버리는 인쇄업자, 충동의 와류에서 허우적대는 지식인과 마주친다. 동시에 악의 감정은 더치고 더쳐 텍스트는 ㅡ 총을 든 겁쟁이, 깨어있는 소시민 등을 양산해내고 있는 거다. 『잠복』이란 단편집…… 주인공의 시선이라는 다소 텁텁한(그럴 수밖에!) 필터를 통해 만들어지는 맥놀이가 얄궂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덧) 아래 사진은 '영구 보존판'이란 딱지가 붙은 「잠복」의 DVD와 해설서인데 ㅡ 30쪽 미만의 단편을 무려 116분의 영상으로 만들었단다. 당연히 보고 싶다……!



사족) 곰곰 머리를 굴려보니 일본의 2인조 록밴드 B'z(비즈)에 기타와 작곡을 하는 마쓰모토 다카히로(松本孝弘)라는 사람이 있는데, 마쓰모토란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제목 짓기' 센스가 발군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그가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노래 제목 몇 개만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안녕 상처투성이 날들이여(さよなら傷だらけの日々よ)」, 「충동(衝動)」, 「맨발의 여신(裸足の女神)」 ㅡ 사실은 좀 억지로 갖다 붙인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