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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맹신자들』 에릭 호퍼 (궁리, 2011)


맹신자들 - 8점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궁리






그는 위대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한 자신을 본다. 그는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불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을 본다. 그는 뭇사람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결함이 그들의 혐오와 경멸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듯 궁지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의롭지 못하고 가장 죄악적인 정념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ㅡ 파스칼 『팡세』




스칼의 무시무시한 말로 시작하고 있으니 더 두렵다. 무능력한 성실함으로 중무장한 맹신자들이. 굳이 러셀의 그것들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호퍼의 아포리즘은 궁극적이며 그의 출신과 뗄 수 없어서 더욱 밀도가 높다. 호퍼가 이 책에서 종교 운동, 사회 혁명 운동, 민족 운동 등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밝히고자 했다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들을 '무자비하게 까발리는' 것이며 또 그렇게 귀결되고 있다. 호퍼는 죽었어도 그의 아포리즘은 죽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맹신자들 역시 아직 존재하며 유효하다. 우리의 열의는 증오심, 잔혹성, 야망, 탐욕, 비방하기 좋아하는 성향, 저항하는 성향을 촉진할 때 기적을 만들어내므로.(p.183) 『맹신자들』에 등장하는 여러 대중운동의 특성은 맹신과 광신이란 단어와 조우하게 된다. 이따금씩 'ㅡ신자' 혹은 'ㅡ주의자'로 대변되는 그(우리)들 말이다. 최근(이랄 것도 없지만) 행해진 선거 등에서 나타나듯 내가 한 표를 행사하면(이 대중운동에 참여하면) 내가 원하고 바랐던 삶이 일순 변할 것만 같은 전망(희망)에 유혹되고 또 선동된다. 실제로 책에서는 좌절한 ㅡ 호퍼에 의하면 이 책에서 '좌절한'이라는 말은 임상학적 용어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인생을 낭비하거나 망쳤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ㅡ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단어를 들으면 곧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종교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맹신자는 명분이 아니라 자신의 '무능력한 열정'과 맺어져 있다). 「맹신자들의 눈에 숭고한 대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줏대도 성질도 없는 사람, 말하자면 신념가의 봉이다. 반면에 서로 다른 경향의 맹신자들은 서로를 도덕적으로 경멸하며 언제든 상대의 급소를 공격할 태세이긴 하지만 상대의 강점을 인정하며 존중한다.」(p.234) 호퍼는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만 같다. ①대중 운동의 토대를 닦는 것은 지식인, ②대중 운동을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③대중 운동을 굳건히 다지는 것은 실천적인 행동가여야 한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를테면 광신자 없이는 투쟁적 지식인들이 만들어놓은 불만이 방향을 잃고 무의미하게 발산되어 무질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쉽게 제압되고 말며, 그들 없이는 이미 시작된 개혁이 아주 극적으로 전개된다 해도 기존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체제에 변화가 생기더라도 보통 한 무리의 행동가에서 다른 무리로 권력이 이양되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할 거라고 덧붙인다 ㅡ 광신자 없이는 어쩌면 새로운 시작이 없을 수도 있다면서.(p.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