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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더 스크랩』 무라카미 하루키 (비채, 2014)


더 스크랩 - 6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비채


방에도 <롤링스톤>이 한 부 있다. 일본에 있을 때 구입했던 건데(당연히 일본어판이다) 2009년 5월에 나온 것이라고 되어 있다. 'the alternative guide'라고 해서 특집으로 출간된 녀석인가 보다. 왜 이런 걸 샀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당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롤링스톤>이니까, 하면서 나도 모르게 집어 들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들춰보니 90년대의 미국문화 어쩌고 하면서 너바나, 스매싱 펌킨스, 벡, 펄 잼 등만을 큼직큼직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니 하루키의 『더 스크랩』을 관통하는 80년대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내가 80년대 태생이라고는 하지만 사물과 인간을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90년대에 들어서부터였을 테니. 그런데 이중에도 무릎을 탁, 하고 쳤던 것은 바로 도쿄의 커피에 대해서였다. 원래대로라면 커피숍에서 마시는 커피를 이야기해야겠지만 나는 좀처럼 커피숍에 가질 않는다. 나란 종자는, 무릇 커피란 것은 동전 몇 개를 짤랑거리면서 자동판매기에 넣은 다음 버튼을 눌러 '주는 대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메아리(亀有)에 살고 있을 때였다(여기서 반년을 살다가 신주쿠로 이사했다). 일단 출근하기 위해 역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에 올라서면, 차량이 들어오는 선로 바로 옆에 자그마한 매점과 자동판매기가 있다. 심지어 재떨이까지 있는 것을 보면 정말이지 흡연자들에게는 친절한 역임에 틀림없다 ㅡ 물론 금연 정책에 의해 훗날 없어지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이사를 간 것은 아니다. 나는 매일같이 가메아리 역 플랫폼에 도착하면 일단 150엔을 챙겨 자동판매기 앞에 선다. 그러고는 동전을 하나씩 흘려 넣으면서 그것들이 쨍그랑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감상하곤 했는데, 저 앞에서는 이미 몇몇 남녀들이 제각기 담배를 하나씩 꼬나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 그리고 드디어 여기서 신통방통한 일이 벌어진다. 커피의 양과 설탕, 프림, 얼음을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등등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다(총 다섯 단계 정도로 조절이 가능하다). 그야말로 흡연자뿐만이 아니라 커피 애호가들에게도 환영받을 일이 아닌가. 맛도 아주 좋아서 굳이 커피숍에 들르지 않더라도 빠듯한 출근길의 달큼한 시간을 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하루키가 추천하는 아오야마의 '다이보'나 그가 <뉴욕타임스>에서 인용한 요요기의 '톰스', 신주쿠의 '고히야' 같은 곳이라면 한 번쯤은 가 보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양반은 도쿄의 커피가 유럽이나 미국의 각 도시에 비해 압도적으로 수준이 높다고까지 장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80년대의 일이다. 당시의 커피숍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을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론은, 다시 한 번 제목처럼 '스크랩'된 기억들일 뿐인 거다. 무엇이든 간에 오래토록 지속되는 것도 있겠고 그렇지 않고 쉬 사라지는 것들도 많다 ㅡ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일 테지만. 그의 말대로 '오오, 이런 일이' 하는 식으로 마음 편하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늙수그레한 아저씨마냥 '그땐 그랬지' 하고 인정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나는 80년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스크랩은 아주 맛좋은 장편(掌篇)처럼 읽히기도 하는 것이다……. 그나저나, 쓰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하루키의 커피가 아닌 내가 맛보았던 커피에 대해서만 추억을 늘어놓은 꼴이 되어버렸다. 가메아리 역 커피 자판기에 누가 관심을 가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