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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살인과 창조의 시간』 로렌스 블록 (황금가지, 2014)


살인과 창조의 시간 - 8점
로렌스 블록 지음, 박산호 옮김/황금가지


트리셔 매거가 탐정을 찾았듯 이번엔 매튜가 범인을 갈구한다. 일단 친구인지 적인지 아리송한 자블런이 죽어버렸다. 금요일마다 전화를 걸어 자신의 생사를 알렸던 자블런. 그런데 전화가 끊겼다. 그는 살아있을 때 매튜에게 단단히 봉한 마닐라 봉투를 건넸고 그 안에는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세 명의 인물이 적혀 있었다. 자블런은 이를테면 협잡꾼으로 이 사람 저 사람의 약점을 잡아 돈을 갈취하던 사내. 전직 경찰인 매튜 스커더는 흔쾌히,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봉투를 열고 만다. 별 믿음도 없이 십일조를 하며 커피에 버번을 타 마시는 남자는 이런 일에 구미가 당기는가 보다. 자블런의 요청은 무엇이었는가. 밑도 끝도 없는 복수다. 그것 하나면 되었다. 어차피 죽어버린 자가 뭘 알겠나. 매튜는 자블런의 복수라기보다 그저 자블런을 죽게 만든 자의 낯짝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의뢰비도 두둑하고 시간은 많다. 이혼한 전처에게 선심 쓰듯 송금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경찰의 끄나풀에 불과한 자블런의 죽음에 관심을 두는 것은 매튜를 제외하곤 없는 것만 같다. 하긴, 그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고서야 귀 밝고 말 많은 공갈범에게 누가 신경이나 쓰겠는가. 각성제를 먹은 상태에서 뺑소니친 여자의 부자 아버지. 포르노를 찍고 이런저런 사고를 여럿 저지른 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여자. 그리고 어린 남자애들에게 성애를 느끼며 주지사가 되려는 남자. 매튜는 이 중에서 자블런을 죽인 범인을 찾아야 한다. 그가 남긴 의뢰비 3천 달러를 들고. 하지만 무면허 탐정 매튜는 어쩐지 안간힘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전 동료들로부터 지속적으로 러브콜을 받는다는 자부심에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뻔질나게 암스트롱에 들러 술과 시간을 축낼 뿐. 자블런의 복수를 하겠다는 의지는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둔 것도 없다. 친구가 죽었으니까. 부탁을 받았으니까. 거기에 돈과 시간이 있으니까. 필요조건이 충분조건으로 됨 직한 명제다. 그거면 됐다. 소설은 아무것도 없다. 매튜도 별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고. 사례를 받았으니 문제를 해결한다, 최소한 그러려고 해 본다, 이것이 그의 사고방식이자 생활방식.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시작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