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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민음사, 2014)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8점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민음사


닫다, 이해하다, 터득하다, 라는 의미의 일본어 사토루(悟る)를 가져다 쓴 '사토리(さとり)세대'라는 말이 이곳저곳에서 심심찮게 들려온다. 돈이나 사치뿐 아니라 출세에도 관심이 없는 일본 청년들을 일컫는 말로, 극도의 현실주의적 양상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한국도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三抛)세대, 저임금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88만원세대, 이십태 태반이 백수라는 의미의 이태백 그리고 이것이 변형된 이퇴백까지ㅡ 직장생활을 하는 이십대라 해도 언제 퇴직해 백수가 될지 모른다는 뜻이란다. 1930년대 일본의 어느 신문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른바 사회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던 시기에는 대학이 많은 비판을 받았으나, 인간적인 면에서는 그때의 학생들이 요즘 학생들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요즘 학생들은 틀에 박혀서, 뭐랄까 관리의 후예들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p.55) 시대상 등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이와 같은 이야기는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예컨대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도로를 점거하고 정부에 맞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쳐주거나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그러나 오늘날 도로 한쪽에서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앉아 목소리를 내는 청년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대부분이 욕지거리뿐이고, 더군다나 청년들에게 안일한 태도를 보이는 이런 자들은 죄다 20년 전, 30년 전 똑같이 거리로 나와 소리 높였던 사람들이다. 아무리 세대라는 말로 구분지어도 언제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를 보고 느끼며 성장하기 마련이니 우리는 늘 스스로를 칭찬하는가하면 또 동시에 싫은 소리를 퍼붓고 있는 셈이며, 지금 사토리세대라 불리는 일본의 청년들을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그대로 투영해도 전혀 이질감이 없다. 이들이 삶에서 찾는 것은 먼 미래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만족을 추구하는데, 바깥에서 보는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소모적이라거나 열망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이성을 만나 결혼을 하고 출산 과정을 거치며 자신들의 집을 가지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해왔으므로 지금의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게 여길는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자신을 붕괴시키면서 가족을 위해, 나아가 사회를 위해 다소 손에 잡히지 않을지도 모르는 행복을 찾았으니 말이다.




대학생인 고스케(21세, 남성)는 「내가 선거에 투표하러 간다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선거는 자신과는 다른 세계, 즉 '높은 분들'이 그들 마음대로 진행하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통계적으로 봐도,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정치적 무력감이 높다. 자신의 힘으로는 정부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 80%나 된다.


ㅡ 본문 p.284 (한국이라고 다를까?)



오늘날의 젊은 세대, 특히 사토리세대라 불리는 청년들은 그렇지 않다. 과거에 비해 개인적이고 뚜렷한 보호색으로 자신들을 감싼다. 이 세계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끔 하는 변화를 꾀하거나 몹시도 큰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도전엔 인색하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일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사회가 보수 일변으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들은 덤덤하고, 철저히 자신의 취향에만 소비하며, 기득권을 무너뜨리려 야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시쳇말로, 하기 좋은 말로 '생긴 대로' 산다. 여러 패러다임을 거친 세상이 이 시점에서 이러한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므로, 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양태에 순응하면서 지내는 까닭인데, 정치적 참여에 소홀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면 금방 설명될 수 있다. 프리터, 내가 일본에서 일 년간 체류하며 본 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이전 세대가 필연적으로 살아온 방식처럼 역시 필연적이다. 물론 일본의 사토리세대와 한국의 삼포세대 혹은 88만원세대를 꼭 같다고는 할 수 없다. 전반적인 상황만 보더라도 일본 청년의 경우 그쪽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우리와는 다르다. 그들이 무언가를 포기한 이후 그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저 포기하는 수순에서 모든 것이 정리되고 만다. 그 앞으로 나갈 수가 없는 거다. 여기에 특히 경제적 여건을 간섭시키면 이야기는 간단한 결론으로 끝난다.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나가는 젊은 세대들은 포기할 수는 있으나 그 과정 이후 만족 단계를 찾기가 어려운 까닭이다(여러 가지 지표나 통계만 보더라도). 자신의 개인적 생활에 다소간의 여유자금을 투자하거나 실질적인 취미를 누리기엔 한국의 청년들은 경제적으로도 빈곤하며 시간적으로도 가난하다. 그러니 이런 청년들을 두고 '요즘 사람들' 운운하며 (저자가 표현한 방식을 빌려오자면)'이해력이 좋은 어른'인 척하는 기성세대들은 '꼰대'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지금 청년들이 이렇게 빈궁한 상태로 혹은 사토리세대에 편입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가까운 미래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누구 하나, 어떤 특정 세대가 곤란한 선에서는 그치지 않는다. 노동을 해, 듣기 좋은 말로 견실한 근로자가 되어(특히 정규직과 같은), 사토리세대 이전처럼 넘쳐나는 노동 인구로 북적이지 않는다면 이것은 고령화와 더불어 사회전체 나아가 하나의 국가를 정비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지금의 젊은 세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며 이미 고령화되어가고 있는 기성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은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이다. 왜 행복한가. 깨닫고, 이해하고, 터득했기 때문에, 즉 사토리(さとり)를 했기 때문에 자그마한 자신의 만족을 찾아 살기로 작정했다는 뜻일 터다. 그럼 이것을 한국에 대입시킨다면? [포기(혹은 현실을 깨달음) → 자기만족]이란 알고리즘으로 설명되는 사토리세대와는 다르게 전개될지도 모른다. 경제적 기반도 충실하지 못하고 기득권에 저항할 여력 또한 없으니, 지금처럼 계속 '요즘 사람들'이란 말을 들으며 '이해력이 좋은 어른들' 아래에서, 그저 절망의 나라에서 살아가야만 할는지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