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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용한 혼돈』 산드로 베로네시 (열린책들, 2011) 다분히 소설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위험도 많고. 그런데 생각해보자. 누구도 너무나 이상하고 너무나 그럴듯하지 않은 생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런 생각은 이런저런 철학자들이 이미 다 했다고 한 데카르트의 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그건 차치하고라도 『조용한 혼돈』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첫 페이지부터 종반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이 책에서 뭐랄까 가슴 먹먹함이랄지 덤덤한 고통 내지는 폭풍 같은 좌절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거라 여겼다. 애초 그런 죄책감을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일이 틀어졌다. 500쪽에 가까운 텍스트는 마지막 단 한 문장을 위해 꿈적이고 있던 거였다……. 하나의 생명이 죽으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질까? 내가 죽는다는 건 단지 뱀이 허물을 벗듯 아주 짤막한 잔상만을 남기고서.. 더보기
『여자들』 찰스 부코스키 (열린책들, 2012) 음. 내가 보기에 마초는 아냐. 마지막에 로셸을 때려치웠잖아. 단지 ‘마지막 한 번’이란 게 좀 걸리긴 하지. 하지만 심지어 강간하거나 강간당하거나 핥거나 치마를 추어올리는 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거다. 문제는 솔직함을 덮고 점잖은 체할 수 있냐는 건데, 그렇게 못해서 이건 마스터피스, 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신춘문예에 『여자들』을 냈다간 바로 아웃이다. 사실 어딘들 그럴 테지. 나는 섹스를 통해 신과 합일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고, 섹스를 하고 나면 편두통이 사라지며, 다른 애들의 부러움을 사려고 인기 있는 남자와 섹스를 하고, 뭔가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남편이 반대할 것 같으면 섹스를 해준다는 여자를 수백 명은 알고 있다. 물론 이런 얘기는 대체 왜 여자들이 섹스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늘어놓.. 더보기
『짐승의 길(전2권)』 마쓰모토 세이초 (북스피어, 2012) 누군가는 그렇고 그런 치정을 다룬 B급소설이라고 할는지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일단 재미있으니까. 나는 트릭을 풀고 범인을 밝혀내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세련됐다, 뭐 그런 생각이다. ‘이야기’가 있잖나. 단 한번이라도 이름이 언급된 인물은 책동의 기미를 보이고, 나라도 그럴 수 있으려나, 하는 ‘텍스트 vs(and) 현실’의 일말의 끈이 있으니까 말이다. 집에 병자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다미코의 생각은 나도 (경험해봐서)안다. 그래서 얼마든지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충분조건이 구비되어 있다. 단, 저 뒤에서 ‘노인의 고독’(하권 p.300)을 깨달았다면 남편의 고독 또한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또한 생긴다 ㅡ 어느 쪽이건 그녀가 씁쓸해지기만 하지만 역시 세이초의 여성 심리묘사는 탁월하다 못해 정말이지 천재.. 더보기
『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7)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그의 작품은 『투쟁 영역의 확장』에 이어 두 번째인데 ㅡ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소립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ㅡ 그가 자신을 두고 절망의 전도사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나 또한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이 책도 두 번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이야기 속의 다니엘이 『신적인 환경』을 우연히 주워 읽고 절규를 토하고서 자전거 공기 주입 펌프를 던져 부숴 버린 것처럼 나도 이 빌어먹을 똥통 같은 텍스트의 지침을 들어가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그래서) 어떤 하나의 가능성, 다니엘과 다니엘25의 가능성, 신경질적이고 쾌활한 개(폭스)의 가능성, ‘기존인류’의 증언이 일치할 가능성, (.. 더보기
『투쟁 영역의 확장』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3) 흡연실을 나와 전철을 타기 위해 나는 정기권을 찍고 오십 미터쯤을 걸어가 선로 앞에 선다. 츄오센은 급행이 많아 집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칸다, 오차노미즈, 요쓰야만 거치면 바로 신주쿠다. 노란선 안쪽으로 펑퍼짐한 카고 바지를 입은 남자가 서있다. 나는 설마, 하며 그의 바지 속에 구겨 넣은 오른손을 주목한다. 그 속에는 아마도 권총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몇 발이 장전돼있는지 꼼지락거리며 세고 있는 중이다. 잠시 후 벨이 울리고 전철이 들어와 서면,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젠장! 이렇게도 무료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고 소리치면서 자신의 입 속에 조그만 탄환 하나를 박아 넣을 것이다. 무심코 돌아본 자동판매기에 드링크를 손에 쥔 남자가 싱글싱글 웃고 있다. 그가 들고 있는 건 리포비탄D..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