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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 (비채, 2013) 안녕, 긴 잠이여 -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나는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을 읽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신주쿠는 등장인물들을 지켜주는 가이아처럼 여겨진다고 내뱉었던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그곳에서 일 년간 살아 보니 처음 발을 들이밀 때와는 달리 점점 집 밖의 아스팔트가 내 발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산에 오르면 모텔 불빛과 교회 십자가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던 어느 철학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곳이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땅은 아감벤이 언급했던 도시(city)가 아닌 수용소(camp)라는, 시쳇말로 개 같은 기분이 그때는 절실히 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라 료의 경우는 어떨까. 나는 그에게 원한 감정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 억하심정이라 하는 편이 .. 더보기
『푸른 작별』 존 D. 맥도널드 (북스피어, 2012) 푸른 작별 - 존 D. 맥도널드 지음, 송기철 옮김/북스피어 Salvage Specialist. 트래비스 맥기의 직업이란다. 그러면서 보수는 의뢰인이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금액에서 경비를 제하고 남은 것에서 절반. 도둑에다가 사기꾼이다. 더군다나 여자까지 후리고 다니는 꼴이라니(자의건 타의건). 섹스와 폭력이 점철된(?) '전설'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이 『푸른 작별(The Deep Blue Good-by)』로부터 시작한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전체적인 흐름 역시 말랑말랑한 필립 말로와 까끌까끌한 샘 스페이드와도 약간 다르다. 으레 그렇듯 주인공을 도와주는 협잡꾼 장물아비도 하나 등장해 주시고 말이지 ㅡ 이 점에서는 매그레와도 다르군(그럴 수밖에).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구분 짓는.. 더보기
『진혼가』 하세 세이슈 (북홀릭, 2012) 진혼가 - 하세 세이슈 지음, 이기웅 옮김/북홀릭(bookholic) 좀 들어 봐, 케이크 하나가 있다 치자고. 내 생일인데도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_뭐, 깜짝 놀래 주려고 연극을 한 거지만. 난 그런 낌새는커녕 하루 종일 뭐 빠지게 일만 죽어라 하다 집에 들어왔어. 불빛은 하나도 없고 숨이 막혀서 가슴이 졸아들지_뭐야 이거, 지금까지 돈 벌어오는 기계로 살아왔는데 이젠 내 인생도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불이 켜지고 사람들이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눈앞에 들이밀고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거야_나는 놀라서 말도 못해_너무 기뻐서. 담배 냄새가 찐득거리는 입으로 촛불을 끄고 소원을 빌지_이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게 해주소서. 모두들 케이크를 한 조각씩 먹으며 웃음을 나눠. .. 더보기
『불야성』 하세 세이슈 (북홀릭, 2011) 하세 세이슈(馳星周) ㅡ 홍콩 배우 주성치의 이름을 뒤집어놓고 일본어로 발음한 필명 ㅡ 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불야성』 단 한 권으로(물론 시리즈가 있긴 하지만) 사람 진을 다 빼놓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는 하드보일드 쪽이라면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 정도밖에 없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극의 전개와 묘사며 인물의 조형이며 독자까지 배신하는 철저함이며, 뭐 하나 뛰어나지 않은 게 없다. 정말 오랜만이다, 한 자리에서 내리 읽게 만드는 작품은. 하드보일드의 태생적 특질, 여기서는 선택, 선택만이 살 길이다.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인공이 붙잡아야 하는 끈은 바로 거기다. 당연히도 나는 슈미트(Carl Schmitt)를 떠올리게 된다. 「적이란 바로 타인,.. 더보기
『몰타의 매』 대실 해밋 (열린책들, 2007) 몰타의 매 -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열린책들 타코마에 사는 플릿크래프트가 10층 높이에서 떨어진 빔에 맞아 죽든 어떻든 간에_새뮤얼 스페이드는 안티히어로의 그것을 보여주려고 한다_아마도 필립 말로였다면 브리지드 오쇼네시를 앞에 두고 경찰에 넘기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우리의 새미는 '얼간이가 되지 않기 위해' 그녀를 뿌리친다_안티히어로답게. 그리고서 평온한 얼굴로 그레이스톤 4500번에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부른 뒤 존스 그릴에 가서 고기구이나 감자구이, 얇게 썬 토마토를 주문해 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거 참, 언제나 죽음은 마구잡이로 찾아오는 게 아니겠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