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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열린책들, 2010)


을 놓고 뒷짐을 지고 있을 때 비로소 창작을 한다. 그리고 사유한 것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텍스트화한다. 작가로서의 나와 나로서의 작가, 외부와 내부, 의자에 앉아 있는 것과 길을 걷는 것 사이의 공명에서 아름다운 ㅡ 치밀하고 고뇌적인 ㅡ 묘사로 풀어지는 또 한 번의 사유. 왜 사유와 텍스트가 동일한가. 왜 사유하는 것이 정제의 작업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활자화되는가. 왜 무엇인가 눈目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흐름이라는 물줄기를 만나는가. 소설 속의 주인공 작가는 ㅡ 텍스트 바깥의 실제 작가는(어느 쪽을 실체라 할 수 있을까?) ㅡ 구경꾼이 되었다가 방랑자가 되고 다시 작가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 작가는 여전히 <산책하는 자>이다. 그는 여전히 바깥과 안을 구분하지 못하고, 나와 작가를 나누지 못한다. 그러면서 순식간에 언어를 발견했다가 또 순식간에 그 언어의 잃기를 반복하며 ㅡ 「오, 머물러라! 너희들, 신성한 예감들이여!」(p.73) ㅡ 과연 이 작품의 타이틀이 『어느 작가의 오후』인지 『작가의 어느 오후』인지 『어느 오후의 작가』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가끔씩 단편적으로 모든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은 계획된 전체의 측면에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오 (...) 나는 영원히 글쓰기를 금지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오. 더 이상 자기 텍스트를 가져서는 안 된다!

ㅡ 본문 p.107~108


이 말은 여기에 등장하는 작가와 번역가 중, 누가 뱉은 말인지도 구분하기 힘들다. 작가의 사유는 상념과 성찰을 동반하며 고독이란 안락함(!)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페터 한트케는 우리로 하여금 『어느 작가의 오후』란 이 '말도 안 되는 시(詩)' 속에서 정처 없이 맴돌게 한다. 그럼 나도 그처럼 이런 알 수 없는 문장을 쓸 수 있겠지. 「『어느 작가의 오후』를 읽었더니 어디선가 고래의 오줌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이렇게. 그리고 약간의 친절함을 베풀어 이런 말을 추가할 수도 있을 거다. 「고래의 오줌을 본 적도 없고 그 냄새가 어떤지도 모르지만 막연히 그런 느낌이 든다. 무슨 냄새인지도 모르고 생김새도 모르는 것이,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는 반드시 존재한다. 현대에는 분명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라는 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