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전2권)』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2013)

· 책_롱 2013. 6. 4. 22:44
  • 와, 이거 벌써 읽으셨군요!
    일본 에도물 특유의 낯선 단어와 이름들이 처음엔 좀 불편할 수도 있는데, 몇 권 읽다보면 금방 익숙해져요~ㅎ
    그나저나 저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BlogIcon 블랑블랑 2013.06.15 14:49 신고
    • 역시 재미있습니다ㅎㅎ 믿고 보는 미미 여사죠ㅋ

      BlogIcon 아잇 2013.06.16 09:44 신고 DEL


진상 - 상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아, 이 책, 두껍다. 해도 해도 너무 두껍다. 두 권 합쳐 1,100쪽이 조금 안 되니까 고래가 숨을 쉬러 물 밖에 나올 때처럼 독자들도 이따금씩 책을 덮고 딴짓을 좀 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뿐이라면 애초 말을 안 꺼냈을 거다. 『진상』, 엄청나게 느리다. 여기에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데, 집어넣은 이야기가 다채로워서 아마도 앞서 말한 '딴짓'은 이 부분에서 다소간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백화만발(百花滿發)이랄까, 그러면서도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삼년불비(三年不飛)랄까, 끝까지 곧장 읽어 내려가면 분명 뿌듯한 감개가 있으리라. 더구나 이만한 분량을 소화해 냈다면 어느 자리에 가서도 당당히 뽐낼 수 있다. 1,000쪽이 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까(사실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 가지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이겠지만 시대물 ㅡ 그것도 '에도 시대물'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독자들이 가지는 반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번이 어쨌느니 마치가 어쨌느니 나가야가 어쨌느니 하는 것들, 거기다가 가게 이름과 수많은 등장인물들까지, 현대물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숱한 고유명사로 인해 자연스레 형성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에 의하면 이 '문제'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음험한 소망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바로 적절치 못한 해결책을 조장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대로 말해서 이 '문제'라는 허들만 넘게 되면 혹은 이것을 '문제'로 취급하지 않으면 꽤 쉬운 형태로 『진상』 읽기에 돌입할 수 있다 ㅡ 친절하게도 책 뒷날개에 등장인물을 따로 모아 놓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것마저 싫다면 그냥 가만히 서서 아웃되는 게 좋을 정도다. 패스트볼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기습 번트를 시도했는데 난데없이 체인지업이 들어와 포수 파울 플라이로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까딱하다간 더블 플레이를 내줄 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지 정보에 '기적의 신약 영묘왕진고(靈妙王疹膏)를 둘러싼 비밀'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잠깐 동안 저 옛날의 '호랑이 연고(tiger balm)'를 떠올렸다……. 어쨌든 그 시절이라고 달랐겠냐마는 일단 신약이니 백신이니 하는 말에는 임상실험, 독과점, 라이선스와 같은 단어들이 뒤따르곤 하는데, 『진상』은 바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 쫄깃한 사리라도 하나 추가하듯 앞서 언급했던 '다채로운 이야기'도 버무려져 있고. 특히 두드러진 것은 ①외모가 남녀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②장남이 아닌 남성의 삶 ㅡ 이 두 가지인데, 어느 쪽이나 볼 안쪽에 스리가 생긴 것처럼 까다롭기 짝이 없다. 무말랭이같이 생겼든 거부감이 들 정도로 잘생겼든 간에, 다소간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미추를 다룬다면 역시나 보르헤스의 문제(음험한 소망)가 끼어들 여지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장남이 아닌 남성의 삶이란 건 또 어떻고. 지금이야 많이 누그러졌을지도 모르지만, '가업은 장남이 이어받는다'는 통념이 있다면 그 형제들은 그저 쓸모없는 터럭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편집자 후기에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ㅡ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는 이 쓸모없는 터럭을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 놓아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증명해냈다. 『진상』은 ㅡ 진상(眞相) 또는 진상(進上) ㅡ 신약 왕진고를 둘러싼 과거의 살인 사건, 남녀의 외모, 장남이 아닌 남성, 이것을 줄기 삼아 읽어 나가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등장인물 개개인의 묘사인데, 외모, 성격, 언변, 무력 등등 꽤 자세하다 싶을 정도로 나와 있어서 흡사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2013』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기야 사스콰치같이 생긴 게 아닌 바에야, 안되는(못생긴) 놈은 뭘 해도 안된다, 안되는(못생긴) 놈은 하다못해 제비뽑기를 해도 안된다, 따위의 말이 통할 리도 없는데다가, 굉장한 미소년으로 그려지는 유미노스케 역시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남성적인 멋은 찾아보기 어려워서 외려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므로, 어찌 보면 이것도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밸런스가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ㅡ 그래서 역시나 유미노스케의 개성보다는 헤이시로의 내레이션 쪽이 더 설득력 있다. 각설하고…… 라기에는 좀 뜬금없지만, 그럼 자, 이제 『진상』을 읽을 시간입니다(더 이상 쓰기가 귀찮은 감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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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현대문학, 2013)

· 책_롱 2013. 3. 24. 16:52


레베카 - 6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하나 화자라고 할 만한 이의 이름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두 소설 모두 그녀들의 입과 생각, 시선만을 차용해 끈덕지게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반대로 양쪽 모두 다소간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헨리 제임스는 유령인지 뭔지의 존재를 확정짓지 않아서 해석의 여지가 조금 더 많은 반면 『레베카』는 살아있었던 인물을 등장시키고 상대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길을 보다 좁혀 놓았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소설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완전치 않을 정도로만. 스티븐 킹에 의하면 모든 공포 이야기들은 두 가지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공포가 자유롭고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악을 행하려는 의식적인 결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과, 공포가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어서 벼락처럼 외부에서 찾아오는 이야기들. 『레베카』는 분명 후자로 여겨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 방에 강펀치를 날리지는 않고, 이를테면 소설이 거의 절반 이상 진행될 때까지 공포의 원흉을 그대로(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화자 밖에 배치해 놓는다 ㅡ 흡사 브램 스토커의 소설에서 드라큘라 백작이 수작을 거는 것과 비슷하게, 댄버스 부인이 '나'의 자살을 종용하는 대목은 공포의 전초전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음과 동시에 공포 자체이기도 하다. 『레베카』에는 공포물을 좋아하는 남자들이라면 언제까지고 싫증내지 않을 겁탈 장면 따위는 없지만 독자가 으레 체험하게 되는 반사회적 행위를 집어넣은 뒤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서 차분히 죽은 자를 끄집어낼 준비를 한다. 여기서 유난스러울 정도로 풀과 꽃과 나무로 묘사된 맨덜리 저택의 미로 같은 구조는, 다소간 비경제적으로 보이는 '나'의 심리 묘사를 뒷받침해 주는 버력이 되며 지적 생명체로 하여금 좌뇌와 우뇌를 위아래로 쪼개 버리고 싶을 정도로 혼란스레 만들기도 한다(주인공이나 독자나 고비를 넘기자면 꽤나 고통스럽지만). 집이란 물건은 때로는 여자들에게 있어 왕국과도 같다. 이 말할 줄 모르는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녀들이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교활하고 소름끼치는 장소일 수 있으며 주인도 모르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무도회장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자인 '나'는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도 눈치를 보아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끼는데다가 온전한 집주인 노릇조차 하지 못한다. 전 주인인 레베카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지 않는 이상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일 뿐이며, 외려 그 집 때문에 파멸당할 위기에 봉착하고 마는 거다 ㅡ 드 윈터도 '나'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맨덜리 저택에서 혼자 지내는 게 두려웠던 것이 아닐는지. 어쨌든 '나'는 처음 보는 남자와 순식간에 결혼해 버리는데(①대체 왜 영국의 여류작가들은 그토록 결혼에 목을 매는가, ②작가가 잊어버렸는지 어쨌는지 결혼 후의 '나'는 반 호퍼 부인과 편지 한 통도 주고받지 않는다 ㅡ 아니면 내 쪽에서 잊어버렸든지), 죽은 레베카의 악의는 살아있는 댄버스 부인으로부터 발현되므로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때로는 결혼 상대인 남편과도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추 세 개짜리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어도 사람은 모르는 거다. 과거와 현실의 접점을 형성하는 것은 우연찮은 외부의 것일지라도 그 과거를 있게 만든 건 정장의 주인공에 다름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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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작별』 존 D. 맥도널드 (북스피어, 2012)

· 책_롱 2012. 11. 16. 12:25
  • 이거 벌써 읽으셨군요!
    전 주인공이 배에서 빈둥대며 살다가 돈 떨어질 때만 의뢰를 받는다는 설정이 맘에 들더라구요.ㅎ
    그런 느긋한 면이 저한테 부족해서인지 뭔가 그런 캐릭터에 대한 동경같은 게 있거든요.ㅋㅋ
    그나저나 저 스페셜 CD 음악 괜찮나요?

    BlogIcon 블랑블랑 2012.11.23 22:25 신고
    • CD는 꽤 좋았습니다. 어쩐지 제가 맥기 씨의 배에 함께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ㅎㅎ 시작부터 랩을 막 하시는데, 막, 막……ㅋㅋ 부디 시리즈가 완간됐으면 좋겠어요 정말. 꼭 시리즈나 전집을 기획하면 엎어지는 경우를 여러 군데서 많이 봐서 그런지……;

      BlogIcon 아잇 2012.11.24 10:20 신고 DEL


푸른 작별 - 8점
존 D. 맥도널드 지음, 송기철 옮김/북스피어


Salvage Specialist. 트래비스 맥기의 직업이란다. 그러면서 보수는 의뢰인이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금액에서 경비를 제하고 남은 것에서 절반. 도둑에다가 사기꾼이다. 더군다나 여자까지 후리고 다니는 꼴이라니(자의건 타의건). 섹스와 폭력이 점철된(?) '전설'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이 『푸른 작별(The Deep Blue Good-by)』로부터 시작한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전체적인 흐름 역시 말랑말랑한 필립 말로와 까끌까끌한 샘 스페이드와도 약간 다르다. 으레 그렇듯 주인공을 도와주는 협잡꾼 장물아비도 하나 등장해 주시고 말이지 ㅡ 이 점에서는 매그레와도 다르군(그럴 수밖에).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구분 짓는 '본격'도 아니니까 그저 능수능란한 문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배빗』에서 속물 덩어리를 맛보았다면 여기서는 천박(이라면 천박)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서. 주인공 맥기를 포함해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마초도 등장하지 않는 본작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영화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 얘기는 꽤 오래전부터 나와서인지 지금은 좀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기야 그의 인상은 미국인의 전형이긴 한데 썩 신뢰 가는 얼굴은 아니라서……. 어쨌거나 맥기가 셜록 홈스를 흉내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까지 쥐어터질 줄은 몰랐다. 상대방을 끝장내는 것도 참 우악스럽기 짝이 없고. 게다가 맙소사, '찰리네 숯불구이'라니(아마도 Charlie Char-Broil?). 명륜동 막걸리집이나 원할머니 보쌈도 아닌 마당에 찰리네 숯불구이라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 급작스런 이스트 터닝이라니! (말년에 유격이라니!) 뭐 우리말로 옮겨놓으니까 당연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좀 구수한 감은 있다. 하여간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커트 보네거트가 「앞으로 천 년 뒤의 발굴자에게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은 투탕카멘의 무덤 같은 보물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던졌으니 나로서는 차근차근 작품을 읽어나가기만 하면 되지 않으려나. 끝으로, 페미니스트가 맥도널드를 읽으려 하면 절대적으로 말릴 것을 당부하면서.



덧) 아래는 UMC의 「자영이」란 곡인데, 『푸른 작별』에 나오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보니 문득 떠올랐다. (모 사건과는 관련이 없음. 그 사건이 있기 전 만들어진 노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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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2012)

· 책_롱 2012. 6. 24. 14:55
  • 이거 꼭 읽어보고 싶던 신간인데 리뷰 넘 잘 읽고 가요~

    BlogIcon 블랑블랑 2012.06.30 22:28 신고
    • 꼭 읽어보시길! 감히 엄지손가락을 들 수 있을 정도예요!

      BlogIcon 아잇 2012.07.01 09:49 신고 DEL
  • 오늘 이 책 결국 샀어요! 요즘 너무 핫하드라구요 ㅋㅋㅋ 요즘 너무 머리 아픈 책만 읽었더니 좀 쉬워가려구요^-^ 근데 이 책 반전으로 어렵지는 않겠죠? ㅋㅋㅋ

    BlogIcon 강맥주씨 2012.07.23 18:40 신고
    •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않고요ㅋㅋ 스케일이 커서 시원시원하면서도 정글 안에서 벌어지는 비밀스런 이야기가 어우러져 영화 한 편을 보는 기분일 겁니다.

      BlogIcon 아잇 2012.07.23 20:16 신고 DEL
    • 음 ㅋㅋㅋ 아껴서 요번 주말에 어디 박혀서 읽어야 겠어요 ㅋㅋㅋ 이런 스케일 책은 한 번 읽다가 끊기면 맥 빠지잖아요 ㅋㅋㅋ

      BlogIcon 강맥주씨 2012.07.24 12:18 신고 DEL
    • 재미진 독서 되시길. 후회하지 않으실 거임ㅎㅎ

      BlogIcon 아잇 2012.07.24 15:19 신고 DEL
  • 엄지 손가락 저절로 올라가는 소리.

    gimgooe 2012.12.21 02:38
    • 읽어보셨나요? 허술한 점도 많지만 스케일이 우왕좌왕해서 어쩐지 (넓은 의미의)재미는 충분하다고 해야 할는지도요, 정말.

      BlogIcon 아잇 2012.12.21 12:18 신고 DEL
    • 네, 두 달 전쯤에 다 읽었네요. 맞아요. 읽을 당시에는 그냥 고개만 갸우뚱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허술한 점이었나 봐요.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주변 사람을한테 선뜻 추천하고 싶을 정도.

      gimgooe 2012.12.21 15:45 DEL
    • 저도 이 책으로 몇 명을 꼬셨는지 몰라요. 참 재밌는 책이라고, 읽으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목 놓아(!) 외쳤더랬지요.

      BlogIcon 아잇 2012.12.22 21:28 신고 DEL
    • 끄덕끄덕. 그런 식으로 오버 아닌 오버 할 만 합니다. 올해의 책으로 꼽는 분들이 꽤 많더라는.

      gimgooe 2012.12.23 01:44 DEL


제노사이드 - 8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황금가지


요시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에는 '뉴타입(new type)'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으로부터 새롭게 발현된 정신능력, 제6감, 초능력, 텔레파시, 천리안 등의 공감각(共感覺) 능력에 대한 것이다. 아니면 《인랑》 ㅡ 이것을 예로 드는 것은 좀 꺼려지지만 ㅡ 은 또 어떨는지. 이른바 '평행세계(parallel world)'를 도입했으니까. 이것도 아닌가? 그럼 브라이언 레반트의 《베토벤》은? 그야말로 '슈퍼 개'가 주인공으로 나와 불법 동물실험을 하려는 작자에게 한방을 날리는 영화 말이다. '인류보완계획'을 내세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또 어떻고……. 『제노사이드』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집착하던 신기루 같은 이야기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도 비슷하게. 인간 탐구의 방법론과 접근법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의 방식은 진부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길이다. 겉표지에 적힌 문구처럼.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모럴 해저드인가? 모럴 해저드 위의 단계를 차지하는 인간의 해이인가? 어설픈 앙팡 테리블 취급을 하는 조야한 인간의 불가해성인가? 『제노사이드』는 걸작이건 졸작이건 둘 중의 하나라고 본다. 어중간하지는 않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러저러한 단점도 눈에 띄지만. 일단 통신이나 위성, 해킹에 손을 대는 '아키리'가 과도하게 전지전능한 모습을 지녔다는 것. 이것은 신인류의 능력, 위에서 말한 뉴타입이란 걸로 해결이 된다고 여겨야 할까. 이래서야 속 편한 결론이지만. 다음은 결말인데, '기프트'란 제약 프로그램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ㅡ 기프트(gift, 천부적인 재능)를 다 하고 ㅡ 되어있다는 설정이다. 이런 식이라면 애초에 이 이야기 자체가 발생하기 힘들다고도 보이지만 당최 일관성은 없어 보인다 ㅡ 일본의 독자들이 반응하는 단순한 전쟁관이나 편향된 역사관(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한국인이라서일까?)은 다소 쓸데없는 논란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으니 차치하고 넘어가자. 처음부터 영화화를 목적으로 했는지 어땠는지 소설은 할리우드식 SF의 면모도 있고 또 등장인물 고가 겐토가 과거 냉전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치 SF 같았다' 라고 느끼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오히려 현실이 SF다!). 그러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말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허술한 액션영화밖에는 안 된다.」 이 작품은 절대 영화화할 수 없다는 단언(혹은 자만)일 수 있겠지만 인터뷰의 전반적인 내용을 훑어보면 텍스트를 손에 쥔 자의 자신감과 약간의 겸손이 들어가 있다. 「전투 장면은 소규모적인 것이 두 군데밖에 없다 (...) 그것을 언어의 힘을 빌려 긴박감을 더해 인물의 감정과 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류사를 담아 (...) 인간의 잔학 행위를 영상으로는 만들기 어렵다…….」 자, ①아키리의 설정이 너무 초인적이라든가, ②스케일이 '너무 커서' 지친다든가, ③용병으로 등장하는 예거의 돈을 필요로 하는 동기가 진부하다든가(파편적으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생각나서), ④뜬금없이 한국의 '정(情)'이 나온다든가 ㅡ 하는 것은 집어치우겠다. 이런 면면은 기술적인 곁다리로 보고 좀 크게 가자.





인간에게 선한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네. 하지만 선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미덕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행동이라면 칭찬받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ㅡ 본문 p.475




왜 '신약 개발'인가. 10만 명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소설 전반부에 나오는 '피그미족 캉가 밴드 40명의 격리 또는 사냥' 혹은 '신인류의 탄생'과 외려 대치되기도 하고 병립되기도 한다. 여기서 이런 알고리즘이 발생한다. 하이즈먼 리포트 #5 '인류의 진화' ▶신인류 '누스(아키리)' 탄생 ▶신약의 필요, 누스의 신약 개발 돌입(현인류의 능력 밖이므로) ▶위험하다고 판단한 현인류의 누스 말살 정책 ▶누스의 반격 ▶신약 개발 완료 ▶누스 말살 정책 폐기(누스의 지력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그가 사라졌다고 판단) ▶현인류의 불치병 치료 ▶평화(▶다시 처음으로?). 신인류가 현인류를 구한 셈이다. 훗날 현인류를 '갈아엎고' 신인류가 현인류로 대체되고 다시 또 언젠가는 새로운 인류가 나타난다든가 하는 결말까지는 가지 않는다(당연하다). 그러니까 단지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맨 밑에서부터 위 끝까지 아우르는 의미에서 ㅡ 「너 = 나 = 우리 = 인간 = 너 = 나 = 우리……」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웅대한 철학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분히 허영에 사로잡혀있고 자기중심적이다.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기보다 탐욕, 잔혹, 자만으로 가득 차있는 존재다. 인간은 결코 지적이지 않다. 인간의 윤리적 기초에 동정심이 존재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전자라면, 그것은 학습된 사회적 반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이런 사유 속에 『제노사이드』는 생명의 논리를 들이민다. (포괄적으로 말한다면)단순히 인간을 후손을 낳는 생존 기계로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그런 끊임없는 생산과 생존만이 진화하는 것이라고 여겨야 하는가의 문제를. 하지만 어떤 경우든 미지의 외부 존재와 마주쳤을 때 쾌감 혹은 불쾌를 겪는 문제가 간섭한다. 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금방 죽을 수밖에 없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 고바야시 마이카, 그리고 처음부터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난 아키리와 에마(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도, 그것을 다수와 소수로 나누는 것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저 옛날 스토아학파의 한 철학자의 중얼거림을 들어보자. 「신이 지금 질병을 나에게 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질병을 추구했을 것이다.」 말인즉슨 삶에 초연하고, 불리한 입장에서 분노하지 않고, 행운을 맞이해도 쾌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인간(우리)은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왜? 인간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착하고 고통 받는다. 첫 번째 논의 ㅡ 소설 초반부의 캉가 밴드를 놓고 하는 입씨름은 그래서 괴로운 물음이다. 나을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로 왜곡되어있다)을 죽일 것인가 격리시킬 것인가. 아니, 애초에 어떤 물음을 던져야 하는가. 두 번째 논의 ㅡ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하고 개인의 이성만을 신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질문. 과거의 홀로코스트나 현재의 다발적 전쟁은 같은 이름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간다.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쯤 세계 종말 시계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posted by 아잇

『잠복』 마쓰모토 세이초 (모비딕, 2012)

· 책_롱 2012. 6. 22. 15:09
  • 작가의 특이함,위대함(?) 때문인지 꼭 읽어봐야 겠군요. ㅎㅎ 거기다 단편이라는 점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요?

    BlogIcon 강맥주씨 2012.06.28 16:18 신고
    • 재미가 쏠쏠합니다. 이 아저씨 자서전도 내년에 나올 예정이라는데 그것도 미스터리한 내용일지……ㅎ

      BlogIcon 아잇 2012.06.29 09:33 신고 DEL
    • 일단은 소설 먼저 꼭 읽어야겠네요 하하 소설을 읽어야 자서전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겠네요 ㅎㅎ

      BlogIcon 강맥주씨 2012.06.29 19:01 신고 DEL
    • 트릭보다는 이야기 중심이라 더(?) 재미있을지도 모릅니다^^

      BlogIcon 아잇 2012.06.30 10:25 신고 DEL
  • 안녕하세요 아잇 님^^
    저도 개인적으로 단편을 좋아해요^^
    특히, 세이초의 단편<잠복>은 정말..뭐라 말로 설명할 빵뻡이 없..ㅋㅋ 좋다, 정말 좋다 라고 밖에는^^
    아잇 님 멋진 리뷰 덕분에 <잠복>의 반응이 좋아요.ㅎㅎ
    이곳 서울은 오후에 천둥을 동반한 소나기를 한차례 퍼붓더니 더위는 좀 가신 듯 합니다. 곧 시작 될 여름 무더위 잘 이겨 내세요.^^

    모비딕_young 2012.07.03 20:36
    • 오잉. 모비딕 님이다ㅎㅎ 세이초 자서전이 내년으로 잡혀 있다는 소식에 혀를 차고 있었는데요. 우선적으로다가 다른 작품들이 좀 더 분발한 다음에ㅋ

      BlogIcon 아잇 2012.07.03 22:29 신고 DEL


잠복 - 10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학의 본질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누락되는 삶 역시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수녀의 일기처럼 순수했던 사람 하나가 웬일인지 범죄자가 된다. 가업을 이으려 착실히 반죽을 개던 선량하기만 한 메밀국수집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를 해한다는 식의(이유야 어쨌든 그런 상황에 몰릴 수밖에 없는) 범죄. 동기는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거기서부터 범죄에 이르기까지의 경위가 애달프다. 고도의 경제 성장, 샐러리맨의 급증, 그에 따라 반듯하게 재단된 사회로부터의 사회적 배경과 인간의 정념이, 얼굴 뒤쪽 보이지 않는 손짓의 '거절하지 못할 제안'과 반응해 몰락의 길을 걷고 만다. '증명 시리즈'로 악명 높은(!) 모리무라 세이치(森村誠一)는 이런 말을 했다. 「'세이초 이전'은 일반 독자들과 동떨어져 있었다. 주로 고답한 문학이자, 문단의 칭찬 일색으로 독자의 선택을 강요하는 문단주도형 문학이었다. 하지만 세이초 작품은 독자가 주도했다.」 그런가하면, 세이초와 친했던 한 고서점 지배인이 언젠가 세이초의 입원 소식을 듣고 얼른 가보았더니 「병원은 심심해서 싫구만, 뭔가 재밌는 것 없을까」 하는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는 적도 있다고 한다.



어떤 작품이야 안 그러겠냐마는, 단편집 『잠복』은 모리무라 세이치의 말대로 독자가 주도하는, 한 사람이 파멸할 때까지 끝까지 가보는, 단편이라는 적은 용량임에도 최대의 중량감에 육박하는 초여름 백화만발(百花滿發)의 성과물이다 ㅡ 병원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쯤 냉동인간으로 있다가 어느 병원에서라도 불쑥 나와 주면 어떨까. '재밌는 걸 좀 찾으러 왔다'고 하면서……. 『세이초와 그 시대(淸張とその時代)』, 『마쓰모토 세이초 사전(松本淸張事典)』 ㅡ 이런 책도 있군 ㅡ 등의 저자이면서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인 고하라 히로시(鄕原宏)는 세이초 연구의 일인자로 알려져 있다. 어떤 작가가 어지간히 유명해지면 그 사람에 대한 책이 종종 출간되기도 하는데, 고하라 히로시가 쓴 책은 '사전'이다(앞의 책). 세이초의 작품,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등을 총망라한 책이 바로 『마쓰모토 세이초 사전』이라고 하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작가였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다음은 고하라 히로시와, 전 아사히신문사 사장 나카에 도시타다(中江利忠)의 세이초에 대한 코멘트이다.





마쓰모토 세이초를 빼고는 일본 미스터리를 말할 수 없다.

ㅡ 고하라 히로시


이 대선배의 오랜 꿈은 자신의 작품의 무대가 된 곳곳을 아사히신문사 전용기를 타고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ㅡ 나카에 도시타다




나카에 도시타다의 말은 실현되었는데, 언젠가 제트기를 타고 운젠후겐산(雲仙普賢岳)의 화산 가스와 재가 날리는 분화구 근처에서 세이초가 흥분한 나머지 필름이 없는 것도 모른 채 셔터를 눌러대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어.」라며 '소년처럼' 분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각설하고, 세이초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ㅡ 이 단편집으로 다시 돌아오면, 그의 작품은 대개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혹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살인을 저질렀을까?」 보다 「아아, 제길, 그럼 주인공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그것만은 제발!」 하는 기대와 불안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는 텍스트와 투쟁하거나 그것에 동화되는 게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원망(願望)'하게 된다. 이를테면 「목소리」의 전화 교환원(다카하시 도모코)이나 「귀축」의 인쇄업자(다케나카 소키치)를 들 수 있겠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평안은 경사진 툰드라 평원의 짧은 여름보다도 더없이 적게 느껴진다. 한창 맛있게 피우고 있는 담배가 그대로 파국의 향(香)을 사르게 되는 꼴이다(도코모 씨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귀축」은 벅수 같은 ㅡ 창자를 찾아내기 힘든 게처럼 ㅡ 인물의 마음속에 똬리를 튼 무사안일로 인해 괴물로 변하는 모습을 그린다. 「목소리」의 경우는 갑작스레 장(章)이 바뀔 때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지는데, 이러한 시점의 변화 ㅡ 꼭 추리편과 해답편처럼, 혹은 밸린저(Bill S. Ballinger)식 컷백처럼 ㅡ 는 왕왕 독자로 하여금 괴로움에 가까운 불안한 추측에 더쳐 정신의 뒤집힌 앙양(昻揚)을 낳게 한다.



줄거리의 조밀함이란 측면에서는 「일 년 반만 기다려」와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를 꼽을 수 있겠다. 전자는 그야말로 카타스트로프의 정점을 찍는데, 여기서는 형사 소송법의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와 함께 맞물린 유연한 '이야기의 그럴듯함'의 경첩이 주인공의 '계산 착오'를 씁쓸하게 만들고 있다. 「지방 신문을 구독하는 여자」는 한 지방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작가가 형사 내지는 탐정의 역할로 분(扮)해 사건을 추적해나가는 이야기다. 미야베 미유키(宮部みゆき)가 편집한 『마쓰모토 세이초 걸작 단편 컬렉션』(북스피어, 2009)에 달린 그녀의 해제는 이 작품을 두고 '끝까지 다 읽은 뒤 다시 한번 앞머리로 돌아와 읽어보라'고 조언한다(나도 그녀의 말에 따라 그렇게 해보았다). 그저 어둡고 무서울 뿐이었던 결말이 새삼 애달프게 변하리라 ㅡ 이 단편은 「얼굴」과도 비교해볼 수 있는데 주인공들이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전전긍긍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 역시 묘한 조바심을 내게 된다. 「얼굴」에 대해 좀 키치적인 비유를 하자면, 통으로 된 아이스크림의 얄팍한 테두리처럼 긁어내면 긁어낼수록 자꾸만 녹아내려 종국에는 다 먹어치워 바닥을 드러내고 마는 무참한 행보랄까……(허허).



표제작 「잠복」은 내게는 최고의 단편이며 동시에 가장 뒷맛이 좋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화자의 입장이 되는 유키 형사는 세이초의 『짐승의 길』(북스피어, 2012)에서의 히사쓰네 형사처럼 자신이 쫓는 여자에게 동화되고 어느 정도의 감정선을 따라간다는 점에서는 일견 비슷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히사쓰네에게는 그 여자를 품으려는 일념이 있었고 또 그 과정에서 죽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유키 형사가 보여준 감정에는 이해와 연민이라는 명제가 끼어든다. 처음부터 그가 작심한 듯 쫓는 여자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이 여자, 수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유키 형사는 어찌된 일인지 '아갈묵념(!)'하고 만다. 그런가하면 「카르네아데스의 널」은 「일 년 반만 기다려」와 같은 맥락으로 형법의 '긴급 피난'이란 조건을 내세운다. 물론 앞의 단편처럼 안쓰러운 결말에서는 매한가지……라는 것은 찰나이며, 이미 등 뒤에서 시작된 오케스트라의 비극적인 연주에 맞춰, 이성에 의해서만 움직였던 인간이 순간의 감정에 휘말리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초는 18세가 되던 해 고쿠라의 작은 지방 신문사인 진서보(鎭西報)의 문을 두드렸다가 학력의 벽에 부닥치고 마는데 ㅡ 그러다 훗날 아사히신문사 규슈 지사가 사옥 신축을 계기로 고쿠라로 이전한 후 그곳에 취직한다. 그렇다면 왠지 수록작 「투영」은 그런 일면을 얼마간 반영한('투영'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이초 자신은 신문사의 꽃인 기자가 아니었기에 소설 속에서나마 그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게 아닐는지. 게다가 이 단편은 인간관계의 정(情)과 '정의는 승리한다'는 쾌감 또한 느낄 수 있어 다른 수록작에 비해 그나마 밝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다만 사건 발생 장치에 좀 무리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대단한 작가라고 해서 어떤 장애나 의무감을 가지고 접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굳이 그의 작품에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지 않아도 읽을 사람은 반드시 읽을 거라는 확신도 있고, 외려 칭찬 일색의 감상은 진정한 가치를 오도할 수도 있다는 추측뿐이다(그렇게 생각하는 주제에 잘도 이런 글을 쓰고 있군……). 단편집 『잠복』에서 우리는 사람들 틈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고 싶었던 배우, 티 없이 순수했지만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여인, 짐승처럼 제 자식을 버리는 인쇄업자, 충동의 와류에서 허우적대는 지식인과 마주친다. 동시에 악의 감정은 더치고 더쳐 텍스트는 ㅡ 총을 든 겁쟁이, 깨어있는 소시민 등을 양산해내고 있는 거다. 『잠복』이란 단편집…… 주인공의 시선이라는 다소 텁텁한(그럴 수밖에!) 필터를 통해 만들어지는 맥놀이가 얄궂고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덧) 아래 사진은 '영구 보존판'이란 딱지가 붙은 「잠복」의 DVD와 해설서인데 ㅡ 30쪽 미만의 단편을 무려 116분의 영상으로 만들었단다. 당연히 보고 싶다……!



사족) 곰곰 머리를 굴려보니 일본의 2인조 록밴드 B'z(비즈)에 기타와 작곡을 하는 마쓰모토 다카히로(松本孝弘)라는 사람이 있는데, 마쓰모토란 성을 가진 자들은 모두 '제목 짓기' 센스가 발군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그가 제목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의 노래 제목 몇 개만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안녕 상처투성이 날들이여(さよなら傷だらけの日々よ)」, 「충동(衝動)」, 「맨발의 여신(裸足の女神)」 ㅡ 사실은 좀 억지로 갖다 붙인 이야기다.




posted by 아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