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전2권)』 최성현 (황금가지, 2014)

· 책_롱 2014. 4. 14. 17:31
  • 임금을 건드린 자는 반드시 죽인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역린! 왕권이 강한 정조였기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로만 봤는데 소설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BlogIcon 아쫑 2014.08.04 11:36 신고
    • 저는 아직까지 영화를 못 봤는데... 평이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보고 싶네요ㅎ

      BlogIcon 아잇 2014.08.04 12:38 신고 DEL


역린 1 - 8점
최성현 지음/황금가지


은 지붕 가마가 언제까지고 철옹성이 되어 주려나. 왕의 길이란 생사의 경계, 그 칼날 위라고 했으니 말이다. 「종기란 놈은 주변에다 범 아홉 마리와 뱀 일곱 마리를 쳐 둘러놓으면 맥도 못 추고 물러가게 돼 있다.」 떠돌이 약쟁이의 부적이 썩어 빠진 정치 모사꾼들에게도 효험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같이 돌멩이를 던지자고 요구할 때 이선(李愃, 사도세자)은 돌멩이를 던지지 않았고, 그 이유로 돌멩이를 든 자들의 돌팔매는 세자에게로 향했다.(p.98) 『역린』은 소모적인 굿판이 되고 만 정조 암살 계획을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곧 개봉할 영화 《역린》은 정조 암살 모의 당일의 하루 동안만을 다루고 있는 모양이어서 그에 앞서 읽어두면 (필시) 좋을 듯싶다.





내전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녀들이 사는 내명부에서는 어떤 궁녀가 후궁으로 물망에 오르는지, 새로 착공하는 궁궐 공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지방관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누가 있는지, 누가 어떤 벼슬에 오르고 누가 누구를 탄핵하는지…….


ㅡ 본문 p.114




사람 하나를 죽이는 일에는 품이 많이 들고 쉽지도 않다. 하물며 밖에서 왕을 암살하려 하니 이렇듯 내부의 일을 속속들이 꿰차고 있는 조력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은 정조 암살 계획 전, 그의 아버지 이선이 살아있을 적부터 큼직하게 훑어 내려오고 있으므로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 이전의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영조의 아들 이선, 그의 동갑내기 아내 홍씨, 그녀의 아버지(호조판서), 며느리보다 어린 계비, 당파와 궁의 내부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표적은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李祘, 정조)에게 향한다. 일견 『역린』 1권은 임오화변, 내달 출간될 2권은 정유역변을 다룰 것인데, 아비와 아들이 모두 죽었거나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역사적 사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소설은 딱딱하면서도 자못 스릴러의 냄새가 풍긴다. 특히 여기에는 훗날 정조를 해하려 하는 살수 집단의 구성 과정 묘사를 비롯해 노론인 아버지와 척을 지게 된 남편 이선과 정치판 사이에서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헤매는 세자빈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어느 때이건 정치 놀음의 혀 위에 선 자들과 그들만의 사회는 불변의 무대라는 것이 재차 확인된다. 아름다운 고담준론은 마타도어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입과 손이 빠른 이들은 난장판 속에서 획책의 꾼이 되어간다ㅡ '난장(亂場)판'이라는 말은 여러 사람이 어지러이 뒤섞여 떠들어 대거나 뒤엉켜 뒤죽박죽이 된 곳을 의미하는데, 우스꽝스럽게도 '난장'의 본뜻이 선비들의 작태를 묘사하는 말이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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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 (현대문학, 2013)

· 책_롱 2013. 3. 24. 16:52


레베카 - 6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현대문학


리 제임스의 『나사의 회전』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하나 화자라고 할 만한 이의 이름이 끝까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면 두 소설 모두 그녀들의 입과 생각, 시선만을 차용해 끈덕지게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반대로 양쪽 모두 다소간 열린 결말이라는 점에서는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헨리 제임스는 유령인지 뭔지의 존재를 확정짓지 않아서 해석의 여지가 조금 더 많은 반면 『레베카』는 살아있었던 인물을 등장시키고 상대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길을 보다 좁혀 놓았다. 대프니 듀 모리에는 소설을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주겠다고 약속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완전치 않을 정도로만. 스티븐 킹에 의하면 모든 공포 이야기들은 두 가지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공포가 자유롭고 의식적인 의지의 행동(악을 행하려는 의식적인 결정)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과, 공포가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어서 벼락처럼 외부에서 찾아오는 이야기들. 『레베카』는 분명 후자로 여겨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 방에 강펀치를 날리지는 않고, 이를테면 소설이 거의 절반 이상 진행될 때까지 공포의 원흉을 그대로(끈질길 정도로 집요하게) 화자 밖에 배치해 놓는다 ㅡ 흡사 브램 스토커의 소설에서 드라큘라 백작이 수작을 거는 것과 비슷하게, 댄버스 부인이 '나'의 자살을 종용하는 대목은 공포의 전초전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음과 동시에 공포 자체이기도 하다. 『레베카』에는 공포물을 좋아하는 남자들이라면 언제까지고 싫증내지 않을 겁탈 장면 따위는 없지만 독자가 으레 체험하게 되는 반사회적 행위를 집어넣은 뒤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서 차분히 죽은 자를 끄집어낼 준비를 한다. 여기서 유난스러울 정도로 풀과 꽃과 나무로 묘사된 맨덜리 저택의 미로 같은 구조는, 다소간 비경제적으로 보이는 '나'의 심리 묘사를 뒷받침해 주는 버력이 되며 지적 생명체로 하여금 좌뇌와 우뇌를 위아래로 쪼개 버리고 싶을 정도로 혼란스레 만들기도 한다(주인공이나 독자나 고비를 넘기자면 꽤나 고통스럽지만). 집이란 물건은 때로는 여자들에게 있어 왕국과도 같다. 이 말할 줄 모르는 콘크리트 덩어리는 그녀들이 자각하든 그렇지 않든 교활하고 소름끼치는 장소일 수 있으며 주인도 모르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무도회장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자인 '나'는 집에서 음식을 먹을 때도 눈치를 보아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감시당하는 기분을 느끼는데다가 온전한 집주인 노릇조차 하지 못한다. 전 주인인 레베카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지 않는 이상 '나'는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일 뿐이며, 외려 그 집 때문에 파멸당할 위기에 봉착하고 마는 거다 ㅡ 드 윈터도 '나'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맨덜리 저택에서 혼자 지내는 게 두려웠던 것이 아닐는지. 어쨌든 '나'는 처음 보는 남자와 순식간에 결혼해 버리는데(①대체 왜 영국의 여류작가들은 그토록 결혼에 목을 매는가, ②작가가 잊어버렸는지 어쨌는지 결혼 후의 '나'는 반 호퍼 부인과 편지 한 통도 주고받지 않는다 ㅡ 아니면 내 쪽에서 잊어버렸든지), 죽은 레베카의 악의는 살아있는 댄버스 부인으로부터 발현되므로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때로는 결혼 상대인 남편과도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추 세 개짜리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어도 사람은 모르는 거다. 과거와 현실의 접점을 형성하는 것은 우연찮은 외부의 것일지라도 그 과거를 있게 만든 건 정장의 주인공에 다름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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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멜라니 킹 (사람의무늬, 2011)

· 책_롱 2012. 5. 7. 13:11
  • 엄마를 보내고 난 후,그런 생각들이 늘 뇌리속에 남아 있어요.
    그래서인지 잠들기가 무서울때가 있어요.;;

    클라우드 2012.05.07 14:58
    • 아, 엄마…… 저도 엄마 돌아가신지 8년 정도 됐네요. 예전엔 꿈도 자주 꿨었는데 말이죠.

      BlogIcon 아잇 2012.05.07 16:46 신고 DEL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 - 8점
멜라니 킹 지음, 이민정 옮김/사람의무늬


확실하고 삶은 불확실하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삶은 불완전하지만 죽음은 완전함 그 자체」이다. 그런데 조기 매장 ㅡ 사후 섣불리 입관 및 매장이 진행되어 ㅡ 으로 인해 관 속의 망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아직 숨이 붙어 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본다면 오히려 삶보다 죽음 쪽이 불확실하다고 해야 할지도. 나는 실제로, 무척 진지하게, 이런 일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가 죽은 뒤 매장이 되었는데 한참 후 내 눈이 번쩍 뜨인다면! 깔끔하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 죽음 이후의 처리는 화장(火葬)으로 하기로. 이것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게 죽는 방법'이다. 어쨌거나 '불확실한 죽음'이 발생한다면 망자의 쉼터가 되어야 할 묘지는 생매장이란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혼란 속의 지옥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실제로 2005년 BBC 뉴스에는, 생매장당할 것을 우려해 사망 후 자신을 땅속에 묻을 때 휴대전화를 같이 넣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기사도 있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죽음의 역사』는 터무니없는 공상 과학 소설처럼 읽히지 않는다. 그 어느 누구도 영화 《쏘우》처럼 자신이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지켜보며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죽음은 그 자체로서 영원하다. 죽음에 대한 상념이라고 할 수 있는 복잡다단한 감정은 영원히 지속될지라도. 지금도 죽음은 섹스와 함께 터부 중의 터부로 남아 있는데, 시간과 죽음이란 건 인간을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만 같다. 이건 아마도 삶이 지닌 특징 중 하나가 유한성이라는 것에서 기인하기 때문일 거다. 책은 조기 매장과 그 대응, 도굴과 이장, 유해, 방부 처리, 추모, 범죄, 감식 등 제목처럼 죽음의 카테고리를 총망라해 다룬다 ㅡ 게다가 시신을 먹는 풍습이 식인 행위가 아니라 고인에 대한 애틋함과 존경의 표시라면 어떨는지? 쉴러의 「인생은 한 번, 죽음도 한 번, 태어남도 한 번, 소멸도 한 번뿐이다」라는 시구처럼 우리는 딱 한 번(당연하다!) 죽는다. 문제는 그 단 한 번뿐인 죽음이란 것은 영원한 것이며 돌이킬 수도 없으며, 심지어 내 죽음을 스스로 확인할 수도 없다는 것. 하긴 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더 끔찍하긴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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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무도』 스티븐 킹 (황금가지, 2010)

· 책_롱 2012. 5. 4. 12:25


죽음의 무도 - 8점
스티븐 킹 지음, 조재형 옮김/황금가지


화 《스네이크 온 어 플레인》을 두고 하는 말 ㅡ 「그냥 내 생각인데, 당신이 이 영화를 싫어한다면 도대체 뭐하러 이 글을 읽고 있는 거지?」 ㅡ 은 뻔뻔함의 극치다. 내가 이 영화를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란, 이게 대체 공포 영화야 코미디 영화야 하는 식의, 이 영화를 보는 시간에 1,000페이지 분량의 책을 읽었으면 적어도 절반 이상은 읽었으리라는 생각에서 나온 처절한 비명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티븐 킹이 이야기하는 '우웩(gross-out)' 단계로서는 탁월하다. 비행기 안에서 발광하는 뱀들 중 한 마리가 어느 뚱뚱하고 음탕한 여자의 눈을 파먹는 장면이 생각났기에 ㅡ 그것도 너무 적나라하게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죽음의 무도』는 지난 30년 동안의 테러와 호러를 다룬 아주 편안한(!) 결과물이다. 공포 영화가 제공하는 예술적 가치는 대단하다. 극장에서 공포 영화를 보며 티켓 값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영화 같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런 보장은 전혀 없지만). 우리가 대처해야만 하는 심증적인 두려움, 공포라는 것의 보편타당성, 사회적 공포의 경향성의 차이 등 공포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풀어나가는 서술과 위트는, 이 책이 방관자의 입장이 아니라 우리를 직접 소스라치게 놀라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공포(그 중에서도 영화)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대단한 텍스트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고. 성직자의 얼굴에 구토하고 십자가로 자위하는 《엑소시스트》, 《트와일라잇》을 얄팍하게 보이도록 하는 《황혼에서 새벽까지》, 뭉크의 「절규」 가면을 쓴 사이코가 나오는 《스크림》, 너무나도 멋지고 탁월했던 《이벤트 호라이즌》 ㅡ 스티븐 킹의 말을 빌리련다, 「이 영화를 싫어한다면 도대체 뭐하러 내 허섭스레기 같은 감상 같지도 않은 감상을 읽고 있는 거지?」 ㅡ 그리고 공포 영화를 패러디하고 '왕가슴 언니들'을 등장시키는 수많은 코미디 영화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진지하게 읽고, 진지하게 공포에 떨었으며, 진지하게 웃었다. 공포라는 장르가 대중에게 어필하려면 피로 점철된 '우웩' 같은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므로(7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 더욱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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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꼼수로 철학하기』 김성환 (바다출판사, 2012)

· 책_롱 2012. 5. 1. 15:47
  • 저도 나꼼수는 들어본 적 없지만, 분명 젊은 층에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여준건 좋다고 봅니다. 걔네들의 방식이 어떻고는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나꼼수가 가져온 현상은 분명 순기능적이라고 봐요. 정부와 여당은 어떻게든 국민들이, 특히 젊은 층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길 바라니까요.

    BlogIcon 찡☆ 2012.05.05 11:11 신고
    • 이따금씩 한국에서 과연 정치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누구나 듣고 알 수 있는 쉬운 정치가 살아나야 할 텐데 말이죠!

      BlogIcon 아잇 2012.05.05 12:44 신고 DEL


나꼼수로 철학하기 - 8점
김성환 지음/바다출판사


꼼수, 나꼼수……. 나는 '나꼼수(나는 꼼수다)'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2012년에 들어서야 1회를 찾아 약 5분 가량 맛만 봤다. 그리고 스피커를 꺼버렸다. 딱히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고. 욕도 '뭘 좀 알아야' 할 수 있는 거다(나꼼수 = 욕이라는 논리는 아니다) ㅡ 나중에 보면 꼭 투표 안 한 양반들이 제일 말이 많으니까. 그러니까 팩트를 알고 의심을 가져야만 욕이라는 애정도 생긴다. 그럼 내가 나꼼수를 듣지 않은 이유는? 예전에 한겨레신문의 '직설'이라는 꼭지가 있었는데 이건 그때와 마찬가지 경우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나꼼수에 대한 책들이 무더기로 쏟아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나왔다 ㅡ 솔직히 나꼼수를 듣지 않았던 건 나 혼자 쓸데없이 바빠 못 들은 거다! 나꼼수에서 한 것들 중 하나는 수용자에게 모리배들의 머릿속을 까발리는 거였다. 이 『나꼼수로 철학하기』는 대놓고 나꼼수를 편든다(나도 마찬가지). 심지어 '철학'이란 단어까지 붙여가면서. 그런데 이거 나꼼수보다 더 재밌다. 왜냐. 원래 세상 대부분의 것들은 후에 그것을 해석하는 데서 쾌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니까……. 나꼼수가 정치적 선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정치적 선동'이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그 선동이란 호도(糊塗)나 오도(誤導)가 아니다. 정치참여와 사유와 의심을 유도하는 것이지. 1%와 99%가 패싸움을 벌인다면 언뜻 1%가 질 것처럼 보이지만 그 1%의 주먹이 만화 「주먹대장」의 그것이라면 게임이 안 되는 거다. 해서 의심해봐야 안다(왠지 '주어 나경원'처럼 들리는군). 그래야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어쨌든 『나꼼수로 철학하기』의 테크닉은 흥미롭고 웃기다(이건 칭찬이다). 뭐든 갖다 붙이려면 안 될 게 없지만 이건 참 적재적소에 철학적 포인트를 들이댄다. 영화 《수취인불명》에서 어릴 적 사고를 당해 한 쪽 눈에 백태가 낀 여고생 은옥을 기억하는지. 은옥은 미군 병사의 '애인' 노릇을 하면서 결국 눈 수술을 받는다(나중에 스스로 그 눈을 다시 찌르긴 하지만). 이 육체적 불구, ㅡ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하는 은옥의, 그런 은옥을 두고 미군과 경쟁하는 동네 청년 지흠의 ㅡ 그리고 정신적 불구들이 바로 우리다. 미군 병사 제임스가 잡지에 실린 여자의 눈을 오려 우리의 눈에 붙여준 거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걸 떼내고 죽은 눈을 찔러야 하지 않을까. 죽은 건 도려내고 재생산 공정에 돌입. 뭐, 이런 논리다. 갑작스런 영화의 비유가 적절치 않건 어떻건 간에,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생각을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정치도 하고 욕도 할 수 있다. 끝.

posted by 아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