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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역린(전2권)』 최성현 (황금가지, 2014)


역린 1 - 8점
최성현 지음/황금가지


은 지붕 가마가 언제까지고 철옹성이 되어 주려나. 왕의 길이란 생사의 경계, 그 칼날 위라고 했으니 말이다. 「종기란 놈은 주변에다 범 아홉 마리와 뱀 일곱 마리를 쳐 둘러놓으면 맥도 못 추고 물러가게 돼 있다.」 떠돌이 약쟁이의 부적이 썩어 빠진 정치 모사꾼들에게도 효험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같이 돌멩이를 던지자고 요구할 때 이선(李愃, 사도세자)은 돌멩이를 던지지 않았고, 그 이유로 돌멩이를 든 자들의 돌팔매는 세자에게로 향했다.(p.98) 『역린』은 소모적인 굿판이 되고 만 정조 암살 계획을 다루고 있는데, 아마도 곧 개봉할 영화 《역린》은 정조 암살 모의 당일의 하루 동안만을 다루고 있는 모양이어서 그에 앞서 읽어두면 (필시) 좋을 듯싶다.





내전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궁녀들이 사는 내명부에서는 어떤 궁녀가 후궁으로 물망에 오르는지, 새로 착공하는 궁궐 공사는 어떤 것이 있는지, 지방관으로 거론되는 인물은 누가 있는지, 누가 어떤 벼슬에 오르고 누가 누구를 탄핵하는지…….


ㅡ 본문 p.114




사람 하나를 죽이는 일에는 품이 많이 들고 쉽지도 않다. 하물며 밖에서 왕을 암살하려 하니 이렇듯 내부의 일을 속속들이 꿰차고 있는 조력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소설은 정조 암살 계획 전, 그의 아버지 이선이 살아있을 적부터 큼직하게 훑어 내려오고 있으므로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 이전의 이야기에서 출발하고 있다. 영조의 아들 이선, 그의 동갑내기 아내 홍씨, 그녀의 아버지(호조판서), 며느리보다 어린 계비, 당파와 궁의 내부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표적은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李祘, 정조)에게 향한다. 일견 『역린』 1권은 임오화변, 내달 출간될 2권은 정유역변을 다룰 것인데, 아비와 아들이 모두 죽었거나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 역사적 사실을 그리고 있기 때문인지 소설은 딱딱하면서도 자못 스릴러의 냄새가 풍긴다. 특히 여기에는 훗날 정조를 해하려 하는 살수 집단의 구성 과정 묘사를 비롯해 노론인 아버지와 척을 지게 된 남편 이선과 정치판 사이에서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해 헤매는 세자빈 등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 어느 때이건 정치 놀음의 혀 위에 선 자들과 그들만의 사회는 불변의 무대라는 것이 재차 확인된다. 아름다운 고담준론은 마타도어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입과 손이 빠른 이들은 난장판 속에서 획책의 꾼이 되어간다ㅡ '난장(亂場)판'이라는 말은 여러 사람이 어지러이 뒤섞여 떠들어 대거나 뒤엉켜 뒤죽박죽이 된 곳을 의미하는데, 우스꽝스럽게도 '난장'의 본뜻이 선비들의 작태를 묘사하는 말이었다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