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의 기술』 쿠르치오 말라파르테 (이책, 2014)

· 책_롱 2014. 4. 26. 10:35


쿠데타의 기술 - 6점
쿠르치오 말라파르테 지음, 이성근.정기인 옮김, 문준영 감수해제/이책


평이라는 것은 가차 없고 날카로우며 무섭다. 최근 로버트 서비스가 쓴 『트로츠키』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가 권력을 장악했더라면 소련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시각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트로츠키가 스탈린주의의 근저에 있었다고 보는 이도 있는데, 트로이카(스탈린,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의 대립으로 보건대 이것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늘 권력의 탈취와 방어에 있어서만큼은 누구에게나 뒷맛이 좋지 않은 마지막 길이 기다리고 있는가 보다ㅡ 트로츠키는 망명했던 멕시코에서 등산 피켈로 살해당했고 그 몇 년 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사이좋게 총살되었다. 심지어 말라파르테는 이 책을 썼다는 이유로 고난의 유배 생활을 겪었는데, 쿠데타라는 것이 은밀하게 계획되어 기습적으로 감행되는 것이 보통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말라파르테는 대낮에 거리 한복판에서 칼에 찔린 것이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백과사전에 의하면 쿠데타라는 말은 '국가에 대한 일격 또는 강타'라는 뜻으로, 영어의 'stroke of state' 'blow of state'에 해당한단다. 그러나 쿠데타의 전형적인 사례를 프랑스적 기원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coup d'Etat>라는 표현을 쓴다ㅡ 이 말은 '정부를 뒤집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체제 내에서의 지배자 교체가 목적이므로 피지배계급이 주체가 되어 체제의 변혁을 꾀하는 혁명과는 달리 보아야 할 것이다. 쿠데타는 꽤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성공에 가까워지는데 군대의 동원이나 주요국가의 지지를 기초로 대통령부의 점령, 공항과 방송국 그리고 은행의 장악 등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공항 없이는 제공권이 없고 방송국 없이는 국민 장악이 없으며 은행 없이는 정부 세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21세기 정치학대사전) 지금껏 쿠데타의 역사는 꽤 많았으며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에 의한 정권의 획득이나 히틀러로 대변되는 나치스가 대표적이다. 물론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1961년에는,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소장 박정희와 김종필, 이낙선 등을 비롯해 육사 8, 9기 출신의 일부 장교들이 장면 내각의 무능력과 사회 혼란을 명분으로 내세운 5.16 군사 쿠데타가 있었다(50년대에 이미 이승만을 축출하려 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들은 제6군단과 제1공수특전단 등을 동원해 청와대를 장악했는데, 당시 장면 내각은 재임기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반란의 정보를 입수하고도 이를 묵살했었다고 한다(그는 미국을 너무 믿었다).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군대, 주요국가의 등장, 대통령부의 점령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말라파르테를 가시밭길로 이끈 『쿠데타의 기술』을 현대의 『군주론』이라 보기에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시대를 뛰어넘어 대체적으로 통일된 정치적, 사회적인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크다. 아마도 역사가 기술하고 있는 쿠데타(와 그 투쟁사)의 모양새라는 것이 별반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세계는ㅡ 몇십 년, 몇백 년 사이 달라진 것이 많기도 하고 전혀 없기도 한 것이다.



덧)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서 '쿠데타'를 검색했을 때 가장 앞서 등장하는 관련 어휘는 '군사 쿠데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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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하버쿡 젭슨의 진술』 아서 코난 도일 (북스피어, 2014)

· 책_롱 2014. 4. 16. 13:33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 8점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송기철 옮김/북스피어


찮은 넘버링 000부터 시작해서 007번이자 8권 째인 『J. 하버쿡 젭슨의 진술』까지 왔다. 솔직히 말해 코난 도일은 그간 (어쩔 수 없이) 셜록 홈스를 제외하면 물음표만 둥둥 떠다니는 작가였다. 정말이지 감가상각 없이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의 수상쩍은 작품집이 출간되었고, 내용마저 머리를 싸맨 채 범인을 밝혀야 하는 '추리물'이 아니었다. 해양구조 컨설턴트(salvage specialist)를 표방한 트래비스 맥기도 아닌 바에야 '해양 미스터리'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기에는 다소 느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출판사 사장님의 인용을 일부 재인용하자면ㅡ 망망대해를 느릿하게 떠도는 배 한 척, 선장도 선원도 없고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그러나 평온한 상태로 발견된 마리설레스트 호의 실화를 바탕으로 코난 도일이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ㅡ 뭔가 악몽 이면의 실상/실상 이면의 악몽이라든지, 책을 펼쳤을 때는 보무당당했지만 정작 다 읽고 난 뒤엔 희열에 찬 죽상을 하게 되더라도ㅡ 이 책을 끝장 보지 않으면 일종의 부작위범이 되어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될 것만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정념에 휩싸이고 말았다. 어딘지 모르게 말레이시아 실종 항공기처럼 소설 같은 현실을 마주한 터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공포를 탐구하는 데는 포의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다. 목침으로 제격인 『우울과 몽상』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맛보았던 흉흉한 정신 상태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는 기가 막히다. 특히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수록된 단편 「가죽 깔때기」를 최고로 꼽고 싶다. 가죽으로 만든 깔때기라는 것도 괴상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ㅡ 라이어넬 데이커라는 사위스런 취미를 가진 남자를 등장시켜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것처럼 음험한 묘사를 잔뜩 늘어놓고는 끝에 가서 '꿈'으로 매조져버리더니, 이번에는 다시 현실의 가죽 깔때기로 돌아오는 모양새가 짐짓 존 딕슨 카의 『화형 법정』 읽기로도 이어질 수 있겠다는(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본 이야기 역시 당연히 재미있고. 바다 한가운데서 발견된 주인 없는 선박, 마녀 재판, 미라와 동방의 언어, 차가운 고립의 공포 이 네 가지를 주제로 한 단편집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만 그것이 코난 도일의 소설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재차 말하지만 셜록 홈스의 망령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도일의 시리즈 외 작품이라는 것은 상당히 놀랄 만한 일일 테니까.



책 말미에서 발견한 사장님의 변

: 많이 팔릴 만한 종류의 시리즈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고 싶어서 냈어요. 팔리면 팔리는 대로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이 시리즈는 계속 낼 생각입니다. 좋아하거든요, 이런 내용의 글을. 다만 시리즈 가운데 몇몇 권은 재쇄를 찍을 여력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말인데, 절판되기 전에 사두시면 좋겠습니다.



덧) 난 몽땅 가지고 있지요.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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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사회』 한병철 (문학과지성사, 2014)

· 책_롱 2014. 4. 11. 17:28
  • 투명사회의 이면을 파헤친 책인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듯 보이지 않는 진실을 감지할 줄 아는 선택적 감별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BlogIcon 아쫑 2014.07.29 13:52 신고
    • 한병철의 「피로사회」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는 합니다만 이쪽도 나름대로 괜찮은 문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비약하지만 않았으면 정말 좋을 뻔했어요ㅎ;

      BlogIcon 아잇 2014.07.29 17:10 신고 DEL


투명사회 - 8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문학과지성사


작과 매한가지로 일상의 언어, 입말이 아니므로 젠체하려 한다는 곡해가 생겨서는 안 된다. 예리한 날붙이는 여기서도 무뎌지지 않았다(다소 과잉된 해석일지라도). 그는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훤히 비추고 노출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디지털 통제사회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그것은 '자유를 집중적으로 활용'한다고 말한다.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빨아먹고 산다고 말이다. 그러고는 투명(성)과 불투명(성)을 언급하며 훔볼트를 불러온다. 「그 누구도 어떤 말 속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 모든 이해는 언제나 몰이해이기도 하며 생각과 감정의 모든 일치는 동시에 분열이기도 한 것이다.」 오직 정보로만 이루어진 세계, 정보의 원활한 유통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불리는 세계는 기계와 유사하다.(p.16) 그러므로 당연히 정보의 많고 적음은 그것의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극장지배(theatrokratie)는 액체 민주주의(liquid democracy)와도 닿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수시로 사회에 참여하려는 개개인은 투명성/투명함을 요구한다. 그의 말대로 과잉 긍정의 세계에서는 '좋아요'만 있을 뿐, 눈을 씻고 보아도 '싫어요' 따위 존재하지 않겠지만(존재할 수 없다)ㅡ 물론 이러한 긍정사회는 '투명사회'라는 전체의 일부가 될 수도 있다. 그에 의하면 시각의 빈틈이 없는 사랑은 포르노이며 지식의 빈틈이 없는 사유는 사유가 아니라 계산적인 것에 불과하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투명사회 = 포르노적 사회>를 성립케 한다. 순수한 투명성/투명함이든 거짓된 투명성/투명함이든 ㅡ 표(表)와 리(裏)가 구분지어지든 말든 ㅡ 사람들은 투명이라는 단어 앞에 이면을 생각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미지의 증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라는 강압에 있다. 모든 것이 가시화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명령은 가시화의 압력에 순응하지 않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 그 점에서 투명성은 폭력적이다.


ㅡ 본문 p.35




그가 인용하는 헤겔의 논의는 이렇다. 사유에는 일정한 부정성이 내재하는데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사유는 자신을 변모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스스로 달라진다는 부정적 특성은 사유를 구성하는 본질적 측면으로서, 단 하나의 인식이 기존의 인식 전체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ㅡ 히친스처럼 회의를 품으라 ㅡ 「정보에는 이러한 부정성이 결여되어 있다.」 투명사회는 시인이 없는 사회이며 유혹도 변신도 없는 사회다.(p.81) 그는 시인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연극적 환상, 가상의 형태, 제의적, 의식적 기호를 생산하는 자, 적나라한 사실에 예술작품, 반(反)사실을 맞세우는 자. 그렇다면 나는 아이웨이웨이를 떠올리게 된다. 「우리가 현실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생산적인 현실이다. 우리는 현실이지만, 현실의 일부라는 것은 우리가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아이웨이웨이』, 미메시스, 2011) 그러면서 한병철은 가상 세계의 무중력적 긍정성에 맞서 이번에는 하이데거를 인용한다. <'숨지 않은 것'은 어떤 '숨음'에서 뜯어낸 것>이다. 투명성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바로 신뢰가 사라진 상황에서 높아지는 것이므로ㅡ 이로써 신뢰의 줄어듦은 또 다른 형태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를 양산해낼 수 있음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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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퍼펑크』 줄리언 어산지 외 (열린책들, 2014)

· 책_롱 2014. 4. 11. 13:18


사이퍼펑크 - 6점
줄리언 어산지 외 지음, 박세연 옮김/열린책들


호(cipher)에 저항을 상징하는 펑크(punk)를 붙여 만든 합성어, 사이퍼펑크. 현재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2년 전쯤엔가 프랭크 에이헌의 『흔적 없이 사라지는 법』이란 책이 출간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늦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책은 강력한 경각심을 깨우게 하지는 못했으나 현재 우리가(온 지구인들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성공적이리라. 구글과 페이스북 사용자들이 누군가로부터 감시당하는 것을 자처하고 있다는 말은 이제 단순한 비유가 아니게 되어버렸으니까. 경제 전문 저널리스트 프랑크 비베 역시 그의 책 『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에서, 시간이 지나면 세상은 (이런 식의) 정보 수집에 그냥 익숙해지고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 빤하다며 구글에 대해 쓴 소리를 한 바 있다ㅡ 그런가하면 함께 언급한 페이스북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만을 남겼다. 「안 좋아요.」





……권력 집단들은 여전히 엄청난 양의 비밀 정보들을 숨기고 있고, 그 규모는 공개된 자료에 비해 압도적으로 크다. 은밀하게 숨겨진 전체 정보의 규모에서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부분은 1퍼센트 정도에 불과하다. 세상의 모든 신용카드 거래 내역을 알고 있는 권력 내부자들과 구글을 이용할 수 있고 세상의 모든 블로그와 댓글을 검색할 수 있는 사람들…….


ㅡ 본문p.188




어산지는 신문 기사의 삭제에 대해 말한다. 역사가 바뀔 뿐만 아니라 아예 사라진 것이라고. 그러고는 오웰이 남긴 명언을 덧붙인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서구 국가들에서는 추적이 불가능한 형태로 역사가 지워지고 있으며, 이는 일종의 사후 검열에 해당한다고 말이다(그러나 이러한 사후 검열이 서구 국가들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보의 자유와 그 정보의 원활한 흐름이라는 말이 '검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한병철은 그의 책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빨아먹고 산다'고 썼는데, 물론 그는 모든 것에서의 투명성을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왜곡된 투명성의 포장을 뒤집어쓰고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까발려지고 깨부수어야 할 중요한 명제임에 틀림없다.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지금 현재에도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는 일ㅡ 언젠가 어산지는 오페라하우스 안을 들여다보다가 쥐 한 마리를 보게 되었는데, 그 쥐는 이리저리 달리다가 천으로 덮인 테이블에 뛰어올라 음식을 마구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그는 쥐의 모습을 보며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미래의 시나리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엄청난 복잡함과 부조리, 타락과 더불어 극단적으로 제한적이고, 동질화된, 초국가적 포스트모던 전체주의 체제.(p.207) 첨단 기술로 무장한 저항 엘리트라는, 바로 오페라하우스 안을 내달리는 똑똑한 쥐들 말이다. 그는 세계 문명은 포스트모던 감시 디스토피아로 전락할 것이며 우리는 이미 그러한 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재 그것이 단순히 가정법으로 설명되어서는 당최 말이 맞지를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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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거슬러』 토마스 에스페달 (열린책들, 2014)

· 책_롱 2014. 4. 8. 16:07


자연을 거슬러 - 6점
토마스 에스페달 지음, 손화수 옮김/열린책들


자의 부엌에서는 언젠가는 싱싱했을 과실의 부패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탐스런 엉덩이처럼 생긴 복숭아는 거뭇한 반점이 생기며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그의 조리대는 이미 시체공시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먹지 못하게 된 복숭아를 종국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별수 없이 버려야 할밖에. 거실에서건 욕실에서건 남자는 이제 혼자다. 누군가의 저택 대문에 기대어 서서 섹스에 몰두했을 때, 풍만함을 지나 점차 두루뭉술해진 여자의 몸을 보았을 때,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내린 아이와 조우했을 때, 마침내 그녀가 죽었을 때, 그리고 복숭아가 썩어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남자는 천천히, 하지만 완벽하게 혼자가 된다. 젊음의 산물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었던가? 그는 빈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급기야는 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토로한다. 집 안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지하실에 앉아 있을 때의 기분과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지하실에 앉아 있을 때의 기분은 천지 차이라면서 말이다. 어느 날엔가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여섯 살짜리 이웃집 소녀가 여자의 안부를 묻는다. 언니는 어디 갔느냐고. 글쎄, 어딜 갔을까. 그녀의 그림자라면 아직도 집에 남아 있긴 한데……. 처음 책을 들었을 때는 시쳇말로 '보급형' 부코스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부코스키보다는 에릭 오르세나의 기민한 서사와 닮아있었다. 부코스키라면 이런 식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여자? 밖을 나서면 널렸다. 담배와 술? 왜 괴로울 때만 그것들을 찾는가.> 대신 그의 사유는 무척이나 느리고 촘촘해서 깜박 잊고 틀어 둔 샤워 꼭지 같다. 그는 한 잔의 샴페인을 마치 한 방울의 샴페인처럼 삼킬 수 있는 남자였으나(p.15) 지금은 술에 취하면 바지에 오줌을 싼 것처럼 뜨뜻한 기운밖에는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때만 존재감을 느낄 뿐이다.(p.226) 책상에 몸을 기대고 드레스를 완전히 걷어 올린 여자를 공격할 줄 알았던 남자는(p.18) 이제 누구를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p.227) ……그는 자연을 거스르려 하는가? 아니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거스르려 하는가?



posted by 아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