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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자연을 거슬러』 토마스 에스페달 (열린책들, 2014)


자연을 거슬러 - 6점
토마스 에스페달 지음, 손화수 옮김/열린책들


자의 부엌에서는 언젠가는 싱싱했을 과실의 부패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탐스런 엉덩이처럼 생긴 복숭아는 거뭇한 반점이 생기며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다. 그의 조리대는 이미 시체공시소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먹지 못하게 된 복숭아를 종국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별수 없이 버려야 할밖에. 거실에서건 욕실에서건 남자는 이제 혼자다. 누군가의 저택 대문에 기대어 서서 섹스에 몰두했을 때, 풍만함을 지나 점차 두루뭉술해진 여자의 몸을 보았을 때,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내린 아이와 조우했을 때, 마침내 그녀가 죽었을 때, 그리고 복숭아가 썩어가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 남자는 천천히, 하지만 완벽하게 혼자가 된다. 젊음의 산물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었던가? 그는 빈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급기야는 정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토로한다. 집 안에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지하실에 앉아 있을 때의 기분과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지하실에 앉아 있을 때의 기분은 천지 차이라면서 말이다. 어느 날엔가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는데 여섯 살짜리 이웃집 소녀가 여자의 안부를 묻는다. 언니는 어디 갔느냐고. 글쎄, 어딜 갔을까. 그녀의 그림자라면 아직도 집에 남아 있긴 한데……. 처음 책을 들었을 때는 시쳇말로 '보급형' 부코스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부코스키보다는 에릭 오르세나의 기민한 서사와 닮아있었다. 부코스키라면 이런 식으로 괴로워하지 않는다. <여자? 밖을 나서면 널렸다. 담배와 술? 왜 괴로울 때만 그것들을 찾는가.> 대신 그의 사유는 무척이나 느리고 촘촘해서 깜박 잊고 틀어 둔 샤워 꼭지 같다. 그는 한 잔의 샴페인을 마치 한 방울의 샴페인처럼 삼킬 수 있는 남자였으나(p.15) 지금은 술에 취하면 바지에 오줌을 싼 것처럼 뜨뜻한 기운밖에는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때만 존재감을 느낄 뿐이다.(p.226) 책상에 몸을 기대고 드레스를 완전히 걷어 올린 여자를 공격할 줄 알았던 남자는(p.18) 이제 누구를 위해 몸을 움직여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p.227) ……그는 자연을 거스르려 하는가? 아니면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거스르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