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마니아』 사이먼 레이놀즈 (작업실유령, 2014)

· 책_롱 2014. 8. 15. 17:13


레트로 마니아 - 10점
사이먼 레이놀즈 지음, 최성민.함영준 옮김/작업실유령


트로가 느슨한 용법으로 정의 내려져 사용되는 현상(반드시 그렇다고는 단정할 수 없겠지만)은 꼴사납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고, 또 낡아 보이기도 하고, 또 친숙/편안하기도 하다. 추억 팔이(재탕)냐 재해석이냐 하는 건 자정(自淨)될 수 있다고 본다. 뭐든지 극에 달하면 순환과 여과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니까. 어쨌든 과거, 회귀, 추억, 회상 등의 측면으로 보자면 '옛것'의 쓰임새는 상당히 다종다양해진 동시에 여러 방면으로 흘러넘친다. 이를테면 광고음악으로 7, 80년대 음악을 차용해 코믹한 분위기를 연출한다든지, 예전의 향수를 자극할 심산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흥행에서 좋은 반응을 얻는다든지ㅡ 아니면 대놓고 과거를 외친다거나 하면서 말이다('응답하라!'). 어정버정한 라이브 실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맨밴드 코넬리우(어)스(Cornelius)의 앨범을(《Fantasma》와 《69/96》 거의 이 두 장뿐이었지만) 줄기차게 들었던 때가 있었다. 특히 「Brazil」을 들으면 아기자기한 안락함보다는 영화가 먼저 떠올라 서둘러 멈추곤 했지만, 시부야계로 표현되는 폭넓은 요소 ㅡ 당연히 레트로도 포함된다 ㅡ 로 인해 다채롭게 '믹스'된 음악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덧붙여 일본 음반 시장이 정말 부러운 것은 '일본반 보너스트랙'이 따로 있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흥미가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 키노코 호텔[キノコホテル]을 듣기도 했지만 일본 쪽도 어딘지 모르게 옛날 같지는 않다ㅡ 멤버들의 헤어스타일이 죄다 버섯[키노코; 버섯] 모양이다.)



또 당시에는 카세트테이프를 듣던 때여서(지금도 집에 모셔져 있어서 이따금 도미노를 만들기도 한다) 공 테이프를 구입해 이리저리 녹음을 하며 가지고 놀기도 했다. 심지어 그것은 윗부분의 구멍을 막으면 재녹음도 가능한 마법의 물건이었다. 적어도 CD-R, CD-RW가 활성화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특히 라디오가 들려주는 음악, 대개 <골든디스크>나 <음악캠프>가 주를 이루었는데, DJ가 음악 자체를 틀어주지 않거나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하면 넋이 나간 듯 앉아있어야만 했다. 언제 어느 채널에서 내가 원하는 노래가 나올지 알 수 없었으므로, 지금은 많이 사라진 레코드숍에 공 테이프를 가져가 약간의 돈을 얹어주고 듣고 싶은 팝 리스트를 건넨 후 다음 날 재방문을 하면 따끈따끈하게 녹음된 결과물을 얻어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소위 주옥같은 멜로디는 이미 나올 만큼 다 나왔다고 생각하는 쪽인데, 그렇기 때문에 음악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음악 기술이나 장비 역시 그때의 것들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만 같다. 지구로 돌진하는 소행성으로부터 인류를 구하는 미국 패권주의의 상징인 영화 《아마겟돈》을 보면 우스우면서도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우주로 떠나기 전 굴착 전문가 해리의 팀원인 맥스가 NASA 국장에게 위험천만한 임무 수행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저 옛날 게임팩처럼 생긴) 8트랙 테이프의 부활이었다.



과거 일상의 지루함을 달랬던 것은 책이나 잡지, 음반이 고작이었는데, ㅡ 내가 80년대 태생이니 그 이전의 것들을 광범위하게 언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나 ㅡ 레이놀즈에 의하면 오늘날의 지루함은 다르다. 그 성격은 과포화 상태, 주의 분산, 쉴 새 없음과 연관되는데, 그 이유는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수천 개의 텔레비전 채널, 무수히 많은 인터넷 라디오 방송국, 미처 듣지 않은 앨범과 보지 않은 DVD, 읽지 않은 책, 미로처럼 끝없는 유튜브(mp3 불법 복제에 관해 언급했던 마이클 잭슨의 반응이 생각난다)의 아(나)카이브……. 그가 말하는 지금의 지루함이란 결핍에 대한 반응, 관심과 시간을 요구하는 과잉에 대한 반응, 문화적 식욕 상실이다.(p.96) 어쨌건 그래서인지 별다른 새로운 것 없이 2000년대 들어 과거를 끄집어내는 작업들은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21세기가 전 세기의 과거로 북적이고 있는 거다(과연 레트로를 힙스터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을까? 아니면 포함관계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빈티지라는 리브랜딩은 여전히 성업 중인데 아카이브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만물상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그간의 쓸 만한 재료가 많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났으면서도 동시에 지금 이 순간 쓸 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때, 한편에서는 카드처럼 '돌려막기' 기술을 펼치지 않으면 레트로는 무의미하게 된다.







레이놀즈가 이야기를 시작하며 21세기 첫 10년을 두고 '재(re)' 시대였다고 털어놓은 것은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발매, 재조명, 재결합, 재활용, 재해석, 재조합…… 재탕. 이것은 단순히 몰개성의 발현이라고만은 단정할 수 없다. 어쨌든 그것들을 (완전하지는 않은) 새로운 결과물이라 봐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싫은 건 이런 경우다. 수십 년 지난 앨범들에서 이것저것 끌어와 별로 들을만한 게 없는 '박스 세트'를 만들고, 먼지 쌓인 고전 멜로디를 찾아 피치만 올려 샘플링하고, 아니면 아예 리메이크나 패스티시를 통해 [재]인용을 하면서 원작을 망가뜨리는 것 등. 개중에는 정말 레트로를 향유하려 한다기보다는 현재에 맞서 개성을 부각시키려는 자들도 있다.) 전적으로 내 취향에 근거하자면 스트록스나 화이트 스트라입스(래콘터스), 카이저 칩스는 그런 면에서 아슬아슬한 편이다ㅡ 특히 스트록스의 《Angles》는 언급 자체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이고(결국엔 말하고 말았지만). 하여간 스미스 요원처럼 복제의 복제의 복제를 감행해 단순히 '과거 채굴꾼'이 되어서는 버텨낼 수 없다. 아무리 기존의 것을 불러와(혹은 몇십 년 전의 냄새가 나도록 꾸며) 사용한다 하더라도 수용자가 납득할만한 물건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지, 유명해지기도 전에 똥을 싸는 자들이 판을 치면 안 되는 거다ㅡ 「유명해져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것이다(Be famous, and the will give you tremendous applause when you are actually pooping[앤디 워홀]).」



다시 말해 어떤 의미로는ㅡ 2000년대의 소리 풍경을 돌이켜보면 결정적인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장르 대부분은 평형 상태에 안주한 채, 좋게 말하면 완만하고 솔직히 말하면 알아챌 수도 없으리만치 느린 속도로 진화했으며, 오늘날 활동가 대부분은 오래전 선조들이 거둔 성과를 팔아먹고 있는 거다.(p.384-385) '바로 전 유행에서만 벗어나는 유행' 열풍이랄까. 물론 레트로 자체를 싸잡아 깎아내리고 싶지는 않다.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과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잘 모르겠다. 새로운 것이라는 망토를 두르고 나와도 쉽게 싫증나는 유행과 그런 조급함이 문제일까(드럼앤베이스와 덥스텝의 사양길[이라 표현해 미안하지만]은 얼마나 빨랐던가)? 그런가하면 개인적이고 지역적인 음악이 (특히 한국에서) 뿌리내리기란 얼마나 힘든가? 너바나와 스매싱 펌킨스는 대체 언제까지 득세할 것인가? 더군다나 지금은 '과거의 복고'와 '현재의 복고'를 구분해야하기까지 할 판국이며 ㅡ 레트로도 결국엔 과거의 재방문만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ㅡ 문화의 다음 단계를 밝히겠다는 소망은 슬프게도 망상이 되어가고 있는데 말이다.



덧) 조지 오웰의 어느 소설에 등장하는 학식이 풍부하지만 정신을 과거에 놔두고 온 포티어스라는 인물은 말한다. 「이 친구야! 태양 아래 새로운 건 없다네.」


사족) 문득 떠오른 건데, 이언 커티스도 2년만 참았으면 그 시대 반항아들처럼 스물일곱이 되어 멋지게 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죽음’마저도 레트로 문화에 넣자는 것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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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하는 진실』 에밀 졸라 (은행나무, 2014)

· 책_롱 2014. 8. 10. 16:20


에밀 졸라 : 전진하는 진실 - 10점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은행나무


1902년 10월 5일, 에밀 졸라가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히기 직전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아직 뚜껑을 닫지 않은 묘혈 앞에서 그를 떠나보내며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는 어리석음과 무지와 사악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모욕의 더미 위에 모두가 우러러볼 높다란 영광의 탑을 우뚝 쌓아 올렸습니다 (...)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의 운명과 그의 용기는 그를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적 양심의 위대한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졸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가해진 크고 작은 테러와 살해 위협으로 미루어보건대ㅡ 졸라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이라는 물증 없는 확신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또 드레퓌스 사건이 완결된 마무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에밀 졸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단 <나는 고발한다...!>라는 처절한 격문인데(그 외에 『목로주점』 정도가 있을까) 진실의 최종 관문을 보지 못한 채 수상쩍은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 자신과 드레퓌스, 그를 지지했던 시민들 그리고 진실을 원했던 이들에게 내려진 불행임에 틀림없다. 『전진하는 진실』은 드레퓌스 사건의 내막,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비롯한 일련의 글들, 그의 생전 인터뷰와 사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으레 [졸라 = 드레퓌스 사건]이란 그림이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만큼 언제나 세간에서는 드레퓌스는 단지 희생자일 뿐이며 진정한 주인공은 졸라 자신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명을 쓴 드레퓌스 대위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면 졸라마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한 프랑스 장교가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는 무관 앞으로 보낸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포병대 대위는 필체가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그리고 독일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것 때문에) 참모본부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된다. 공공연하게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시절 언론마저도 이를 묵인하는가하면 한편으로는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의 혐의에 대한 논란을 부추겼다. 졸라는 1897년 <르 피가로(Le Figaro)> 지에서 일부 언론을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저열하다'며 그들이 추잡스런 신문을 팔기 위해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들의 신문에는 독물이 섞인 강물이 넘쳐흘렀다. 어쩌면 그런 게 공정성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여기저기에 찔끔찔끔 소심한 평을 하는 것으로 그치면서, 고귀한 가치를 소리 높여 외치는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다니, 단 한마디도!」ㅡ <르 피가로>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일간지로 중도우파 성향의 보수 색채를 띤 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이며, 당시 드레퓌스의 편에 섰지만 보수 독자들의 항의와 구독 철회로 인해 판매 부수가 2만부까지 급감했다(그러나 반드레퓌스파로 돌아서지는 않았다). 졸라의 이 기고문이 실리기 하루 전, 당시 내각의 수장인 쥘 멜린(Jules Méline)은 의회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 중에 「드레퓌스 사건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라고 발언한 터였다. 하지만 지난한 세월이 흐른 뒤 진실은 어렵게 밝혀지고 만다. 졸라 역시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든 시작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 지 1면에 실린 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당시 졸라가 팸플릿으로 제작한 기고문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국의 2013년이 끝나갈 때쯤부터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릴레이를 떠올리게 한다. 한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된 이 대자보는 철도 민영화, 불법 대선 개입, 밀양 송전탑 사태 등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청년들을 향한 외침이었다ㅡ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졸라가 꾸짖은) 언론과 같이 당시에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찢는 자들과 함께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졸라는 글에서, 학생들을 들고일어나게 했던 고귀한 열정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청년들은 언제나 불의에 분노하며 흉포하고 강한 자들과 맞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박해받은 이들을 위해 싸웠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행복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운명의 무게를 그릇되게 재는 세상의 불공평한 저울 위에 그대들의 뜨거운 젊음에서 우러나오는 항의를 올려놓기 위해서인가? (...) 아,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그대들의 앞에 놓인 고귀하고 원대한 일들을 잊지 말기를!」 그리고 뒤이어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프랑스가 쓰레기 같은 언론이 발표하는 거짓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다고 꼬집었다ㅡ 「프랑스여, 그대의 여론은 (...) 권력의 테이블을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탐욕스런 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 (1897. 12. 14)





졸라는 1898년 <로로르(L'Aurore)> 지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기고한다(30만 부 판매)ㅡ 원래는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이지만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획기적인 타이틀을 붙였다. 그러고는 군사법원과 판사들의 선입견 그리고 불공정한 판결에 대해 토로하며 다음과 같은 기판력(旣判力)의 모순을 추궁했다ㅡ 기판력은, 확정판결을 받은 사항에 대해서는 후에 다른 법원에 다시 제소되더라도 이전 재판 내용과 모순되는 판단을 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 소송법적 효력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다. [①드레퓌스는 군사법원에 의해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 ②따라서 그는 유죄이다. → ③그러므로 군사법원은 그가 무죄임을 선언할 수 없다. → ④그런데 에스테라지(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은 곧 드레퓌스의 결백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였으니 드레퓌스 대위의 복권은커녕 재심조차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또한 당시 국방부장관 등부터도 졸라에게까지 명예훼손의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등 정의가 난도질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대위 하나가 순식간에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군적 박탈을 당하고, 또 멀리 유배에 보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재판의 파기가 선언되자 드레퓌스 대위는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같은 해 재차 유죄를 선고받고(유죄 판결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정상참작과 함께 10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또다시 1년 뒤, 당시 법무부장관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반역죄를 제외한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는 사면법에 관한 법안을 상원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것은 드레퓌스 대위의 완전한 복권이 아니지 않은가. 진실과 정의는 무척이나 더디게 찾아왔다. 6년이 지난 1906년, 드디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이미 졸라가 죽은 뒤였다). 아나톨 프랑스가 졸라의 장례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저들이 저지른 사악한 행위들을 알게 되었고 기어이 진실은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ㅡ 그러나 보라, 적대적 시위가 벌어질 것을 염려해 졸라의 장례식장에조차 참석하지 못할 뻔했던 드레퓌스는 1908년 졸라의 유해를 국립묘지 팡테옹(Panthéon)으로 이장하던 때 보수 일간지 <르 골루아(Le Gaulois)> 지의 편집인이 쏜 총에 맞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실천적 지식인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에밀 졸라는 1900년 드레퓌스의 사면법이 가결되기 직전 그와 처음 만났을 정도로 둘은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일에 침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첫걸음을 떼었으니 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며, 언젠가는 결정적인 마지막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사실이다.」





▼ 1898년 3월, 졸라의 지지자들은 <나는 고발한다...!>의 발표를 기념하여 메달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모두 1만 683프랑이 모금되어 제작된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메달은 2천여 명의 기부자 명단이 적힌 붉은색 가죽 장정의 노트와 함께 졸라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는 아직 승리자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이르다는 소감을 밝혔다(훗날 졸라의 부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 앞면에는 졸라의 초상과 함께 <에밀 졸라에게 바치는 경의>라는 문구가, 뒷면에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에밀 졸라. 1898년 1월 13일>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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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한문화, 2003)

· 책_롱 2014. 8. 9. 11:43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 8점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한문화


뭐, 좀 키치할 수도 있고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숨겨진) 아주 작은 코드를 언급하지 않은 것에서(놓친 것일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우리를 미치도록 궁금하게 만드는 것들을 설명해보려는 시도는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물론 우리 역시 매트릭스에 갇혀있다면 아무리 이런 논의를 해도 그 기계들은 코웃음을 흘리고 있을 테지만)ㅡ 토머스 앤더슨/네오와 사이퍼(배신자)가 공존하는 이 미망(迷妄)의 현실세계에서 말이다. 이를테면 네오의 매트릭스 안에서의 이름 토머스/예수의 부활에 의구심을 갖는 제자 '의심하는 토머스', 탯줄 같은 케이블을 뽑아내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네오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육된다'는 점에서의 처녀 잉태, 죽은 네오를 부활시키는 트리니티/trinity(삼위일체), 그들이 타고 다니는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호에서부터 매트릭스 안에서 고치처럼 웅크린 자들의 '인간 발전소'와 같은 모습, 이러한 기독교적 명제와 더불어 불교적 교리까지(휘어지는 숟가락 등). 물론 이것은 영화에 집어넣은 주제들 중의 일부에 그친다. 「나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내가 이걸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나의 뇌에다 이게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고 말해 준다는 걸 알고 있다고. 9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에 내가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무지가 바로 행복이라는 거야.」 스미스와 교섭하는 사이퍼의 대사다. 만약 우리의 뇌가 나머지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커다란 통에 담겨있고 컴퓨터가 전자 충격을 뇌에 보내 이런저런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실제 경험을 한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고, 또 사이퍼의 배신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자유를 갖고 있으려면, 우리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자유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만약 당신에게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할 자유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지, 자유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27) 이 말은 맑스가, 노동과 그들이 생산하는 자본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자들은 작업 시간과 작업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용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도 그들 자신은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유 시장'에서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팔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오/사이퍼의 선택을 두고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네오마저도 자발적으로 빨간 약을 골랐다고는 자부할 수 없다. 만약 예언자(오러클)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면 그 미래 역시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나.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본다는 것은, 그것이 발생한 동시에(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므로) 발생하지 않았다(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ㅡ 게다가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다면 모피어스를 배신한 사이퍼의 결심 또한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이 세계가 변화할 뿐이지 그것이 진화나 진보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변화’라는 범주 안에 진화와 진보가 속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수상쩍게 생각한다……. 지젝에 의하면 엘리베이터에 있는 닫힘 버튼은 실제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고물이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에게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높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기여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결국 문은 닫힐 것이므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빨리 움직이도록 어떠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참여'에 빠져있다.(p.315)



덧) 영화는 1999년에 만들어진 단 한 편으로 끝났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네오의 단 한 마디로 요약된다. 「W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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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의 오후』 우에노 지즈코 (현실문화, 2014)

· 책_롱 2014. 7. 28. 21:13
  • 노후의 그 낭만을 온전하게 홀로 즐길줄 아는 남성은 더 매력적일 것 같습니다.

    BlogIcon 아쫑 2014.07.31 10:18 신고
    • 그러니까 말이죠ㅎ 인구구조가 변하는 것에 생활 양식도 같이 변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지만..

      BlogIcon 아잇 2014.08.01 09:18 신고 DEL


독신의 오후 - 6점
우에노 지즈코 지음, 오경순 옮김/현실문화


들에겐 편의점이 있고 포르노가 있으며 시간도 있다. 남녀평등의 주가가 오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남자는 제 손으로 밥해 먹기를 끔찍이도 싫어하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 또한 잘 느끼지 못한다ㅡ 하지만 그들에겐 문명의 이기, 편의점이 있다.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 따위 개나 줘 버리라는 식으로 연애만을 꾀하거나 기꺼이 상품이 되어주겠다는 여자 연예인을 안주로 삼아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ㅡ 하지만 그들에겐 포르노와 케이블 채널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완전히 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부모를 부양하거나 혹은 남에게 의탁하면서? 조카들의 재롱만을 추구하며 이따금씩 피붙이로부터 애물단지 취급을 받으면서? 때로 '친구'와 '지인'을 구분해놓고 시간을 쪼개가며 어정쩡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런데 희한 것이 있다. 처음 보는 미지의 사람과 맞대면한 채 담배를 뻑뻑 피우는 흡연구역에서,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서로의 맨살을 구경하며 트림을 해대는 사우나에서, 신랄하게 정치판을 풍자하는 아나운서와 평론가들이 등장한 대형 텔레비전이 설치된 대합실에서ㅡ 그들은 서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꺼내며 스스럼없이 대화를 시작하곤 한다. 그런가하면 직장과 가족 이외의 인간관계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은 물론이거니와 (여성 화장품을 사용하고) 여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왔던 꽃꽂이나 뜨개질을 하는 수컷들이 생겨나고 있는 지금,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동호회나 우연찮게 술집에서 안면을 튼 사장 혹은 단골들과의 제2, 제3의 인간관계가 시작되기도 한다ㅡ 남자들이란 언제든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모양이다. 독신이란 것은 자신의 소득을 스스로 관리하며 소비하는 데 있어 얽매임이 없기도 하지만 심한 감기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하면 온전히 혼자만의 몫이란 것을 감당해야 한다. 그들은 집 안 구석구석을 자신의 동선에 맞게 바꾸어놓는 자유를 누릴 수는 있지만 결혼한 친구들의 아이를 바라보며 가정이 생긴 이후의 예전 같지 않은 그의 배려를 통감해야 한다. 자, 그러면 연애를 해 볼까? 그는 어찌어찌 주파수가 맞는 처녀를 만났다. 연애의 장점을 과감히 버리고 들어가 보자면, 가장 먼저 깨지는 것은 그의 익숙했던 생활 패턴이다. 그는 그녀와 함께 출근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는 불편함을 감수할 때도 있을 것이고, 내키지 않는 정열을 쏟으며 생일 케이크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며, 이 모든 것을 장점으로 승화시켜 관계를 이어갔더라도 정작 작별의 순간이 닥쳤을 땐 잠깐이나마 독신을 벗어나 새로운 가족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꾸었던 것을 잊어야만 할 것이다(여기에 빗대어 섹스 파트너의 중요성을 외치는 것은 너무 일면만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혼자 사는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 구성원이 되는 셰어하우스는 어떨까. 개인들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한편 싱글 라이프의 단점은 상쇄시켜 일종의 정신적 빈곤을 해결해주는 주거 방식. 문제는 함께 지내는 공동 주거인들끼리의 정서적 유대를 깨뜨리는 다툼이 일어나면 그들은 갈 곳이 없다는 점이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품의 구매, 비용, 세탁과 청소 등의 역할 분배, 활동하는 시간대의 차이, 소음, 입주자를 찾아오는 방문객(이 상태에서 누군가의 애인이 찾아와 공동 주거인들의 눈을 피해 섹스를 하려 한다면?). 물론 독신의 형태가 이러한 사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혼 뒤 혼자가 되거나 사별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홀로 살아가는 생활 형태에 놓인 남성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직면해야 하는 것들이다.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면 질병이 찾아오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가 아니라 그의 부모가 먼저일 터다. 제 몸 추스르기도 벅찬 나이가 된 그는 부모의 간병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정년을 맞아 퇴직하기 이전에 대책을 세워놓아야 하며 사회적 인간관계 역시 자신의 직함이 없을 때의 경우가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젊을 때의 독신과 인생의 오후에 놓인 독신은 전혀 다른 것이다. 팔팔한 청춘이 반드시 낭만적인 것은 아니듯 노후에 놓인 남성이 낭만만을 논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낭만적일 뿐이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osted by 아잇

『강대국의 경제학』 글렌 허버드, 팀 케인 (민음사, 2014)

· 책_롱 2014. 7. 28. 11:11
  • 보수와 낙관이라는 설명에 공감이 가네요. 그리고 실제로 눈을 가리고고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대국들의 정치 경제적인 면에서의 폭주가 근심스럽기도 합니다.

    BlogIcon 바람다당 2014.07.30 22:33 신고
    • 요즘 이런 비슷한 책들이 우후죽순으로 출간되는 것 아닌가 하다가도, 막상 읽고 나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됩니다..;

      BlogIcon 아잇 2014.07.31 09:40 신고 DEL


강대국의 경제학 - 6점
글렌 허버드 & 팀 케인 지음, 김태훈 옮김/민음사


반적으로 다소 낙관적이고 다소 보수적이랄까(너무 거시적이어서 그럴지도). 물론 현실적이기도 하다ㅡ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므로. 책은 로마의 붕괴나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등을 사례로 들며 현대의 재정 문제를 꼬집는데, 일단 지금 현실을 보자. 미국의 실업수당 신청 건수가 지난 몇 년보다 낮아진 것의 이면에는 다른 거품이 있는 게 아닐까? 미국의 경기는 회복하고 있는 것일까? 달러의 노후대책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일까? 주가 상승은 결국엔 착시적 허울이 아닐까? 실업자들이 경기 회복에 참여하고 있기는 한 것일까? 중국이나 유로의 움직임은? 물론 이러한 물음들은 유의미해 보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책에서 다루기에는 성격이 다르기도 하다. 나는 전쟁과 다툼을 넘어 경제(혹은 불황)에 관해서도 이따금씩 존 레논의 노랫말을 생각하곤 한다. 나라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죽고 죽이는 것도 없고 종교도 없이. 그러면 어떤 국가든 다른 나라에 대해 눈치싸움이나 치킨게임을 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말이 가당키나 한가, 하는 반문이 되돌아온다. 현실의 괴리를 증폭시켜 지극히 이상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의 논의가 불필요한 것만은 아니다. 전 세계인들은 쓸데없는 곳에 돈을 쏟아 붓고 쓸모없는 것에 열을 올리며 사용하지도 않을 것을 분석하고, 쪼개고, 구축하면서 낭비한다. 경제 위기? 몰락? 당연하다. 경제는 곧 정치라는 명제 하에서는 기존의 정치구조가 옷을 갈아입지 않는 한 개혁과 타개는 없다. 세제 개혁을 통해 기업 소득에 대한 세율을 삭감하는 것이 반드시 신규 고용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방끼리 토지와 기업에 대한 직접 자산 투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만이 반드시 동맹 협정과 유대라고 볼 수는 없다(그들만의 리그는 또 다른 고립자를 낳는다). 내가 처음에 낙관과 보수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강대국의) 경제의 더러운 뒷면을 노골적으로는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그 패턴, 번영, 경제 불균형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피는 것이므로ㅡ 로마, 중국, 스페인 일본 등의 성장과 몰락을 주시한다. 로마에서는 재정, 통화, 규제를, 과거 중국과 스페인에서는 해상 교역의 축소와 재산권을, 일본에서는 잘못된 부양책을 분석하고 있다.



현대 유럽의 경제 위기, 다종다양한 패권 다툼, 당파적 양극화, 재정 적자 등은 어느 한 국가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 경제 문제를 두 저자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와 정책 대립을 넘어 조금은 큰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ㅡ 이들은 고립의 위험은 얼마간 설명하면서도 팽창의 이면에는 약간 소홀한 듯한데, 그러면서 이 같은 '몰락'을 막기 위해 자유시장 확대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거기에는 책의 제목처럼 '균형'이 반드시 들어가야 옳다(그러나 현실이 과연 그렇게 흘러가줄까?). 두 저자는 강대국 쇠퇴의 이유를 경제적 속성과 침체된 정치 체제에서 찾는다. 이를테면 과잉 팽창, 과도한 군사 지출 역시 경제의 균형을 잃게 만들 수 있으나 그것이 성립하지 않는 반례가 너무 많으므로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주장한 제국의 과잉 팽창 요인을 제거한다(케네디 스스로도 군사력을 경제적 생산력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정치 체제가 발전하지 못하면 경제 또한 그러리라고 믿는다ㅡ 그러므로 다시금 <경제 = 정치> 혹은 <경제 ≒ 정치>라는 수식이 성립하고 '신고전'이나 '케인스'와 같은 말이 득세하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 없다. 하지만 제도라는 것은 경제적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으며 그것을 체계화하는 일종의 제약이다(반대로 그 제도를 입맛에 맞추기 위해 경제적 파워(로비)를 가동시키지 않던가?). 경제력 혹은 제도의 균형을 찾으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되고, 몰락의 증거에서 반추할만한 것을 찾아내는 작업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다. 뜀박질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바람을 기다리는 것은 우매한 행동이다. 하물며 100달러짜리 지폐가 누군가 주워 가기를 기다리면서 길에 떨어져 있는 경우는 좀처럼 없으니까 말이다.(p.97)



posted by 아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