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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전진하는 진실』 에밀 졸라 (은행나무, 2014)


에밀 졸라 : 전진하는 진실 - 10점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은행나무


1902년 10월 5일, 에밀 졸라가 몽마르트르 묘지에 묻히기 직전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아직 뚜껑을 닫지 않은 묘혈 앞에서 그를 떠나보내며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는 어리석음과 무지와 사악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모욕의 더미 위에 모두가 우러러볼 높다란 영광의 탑을 우뚝 쌓아 올렸습니다 (...) 그를 부러워합시다. 그의 운명과 그의 용기는 그를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인간적 양심의 위대한 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죽는 순간까지 졸라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가해진 크고 작은 테러와 살해 위협으로 미루어보건대ㅡ 졸라의 죽음이 정치적 타살이라는 물증 없는 확신으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또 드레퓌스 사건이 완결된 마무리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의 죽음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에밀 졸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일단 <나는 고발한다...!>라는 처절한 격문인데(그 외에 『목로주점』 정도가 있을까) 진실의 최종 관문을 보지 못한 채 수상쩍은 죽음을 맞이한 것은 그 자신과 드레퓌스, 그를 지지했던 시민들 그리고 진실을 원했던 이들에게 내려진 불행임에 틀림없다. 『전진하는 진실』은 드레퓌스 사건의 내막,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를 비롯한 일련의 글들, 그의 생전 인터뷰와 사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으레 [졸라 = 드레퓌스 사건]이란 그림이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는 만큼 언제나 세간에서는 드레퓌스는 단지 희생자일 뿐이며 진정한 주인공은 졸라 자신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명을 쓴 드레퓌스 대위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렸다면 졸라마저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한 프랑스 장교가 파리의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는 무관 앞으로 보낸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포병대 대위는 필체가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그리고 독일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것 때문에) 참모본부로부터 스파이 혐의를 받게 된다. 공공연하게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시절 언론마저도 이를 묵인하는가하면 한편으로는 반유대주의와 드레퓌스의 혐의에 대한 논란을 부추겼다. 졸라는 1897년 <르 피가로(Le Figaro)> 지에서 일부 언론을 '발정이라도 난 것처럼 저열하다'며 그들이 추잡스런 신문을 팔기 위해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들의 신문에는 독물이 섞인 강물이 넘쳐흘렀다. 어쩌면 그런 게 공정성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여기저기에 찔끔찔끔 소심한 평을 하는 것으로 그치면서, 고귀한 가치를 소리 높여 외치는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다니, 단 한마디도!」ㅡ <르 피가로>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일간지로 중도우파 성향의 보수 색채를 띤 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이며, 당시 드레퓌스의 편에 섰지만 보수 독자들의 항의와 구독 철회로 인해 판매 부수가 2만부까지 급감했다(그러나 반드레퓌스파로 돌아서지는 않았다). 졸라의 이 기고문이 실리기 하루 전, 당시 내각의 수장인 쥘 멜린(Jules Méline)은 의회에서 열린 대정부 질문 중에 「드레퓌스 사건은 존재하지 않으며,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라고 발언한 터였다. 하지만 지난한 세월이 흐른 뒤 진실은 어렵게 밝혀지고 만다. 졸라 역시 드레퓌스 사건에 뛰어든 시작부터 다음과 같이 선언한 바 있다.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 1898년 1월 13일자 <로로르> 지 1면에 실린 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당시 졸라가 팸플릿으로 제작한 기고문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국의 2013년이 끝나갈 때쯤부터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릴레이를 떠올리게 한다. 한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된 이 대자보는 철도 민영화, 불법 대선 개입, 밀양 송전탑 사태 등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청년들을 향한 외침이었다ㅡ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졸라가 꾸짖은) 언론과 같이 당시에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를 찢는 자들과 함께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졸라는 글에서, 학생들을 들고일어나게 했던 고귀한 열정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청년들은 언제나 불의에 분노하며 흉포하고 강한 자들과 맞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박해받은 이들을 위해 싸웠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청년들이여, 그대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 행복한 사람과 불우한 사람의 운명의 무게를 그릇되게 재는 세상의 불공평한 저울 위에 그대들의 뜨거운 젊음에서 우러나오는 항의를 올려놓기 위해서인가? (...) 아, 청년이여, 청년들이여! 부디 그대들의 앞에 놓인 고귀하고 원대한 일들을 잊지 말기를!」 그리고 뒤이어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프랑스가 쓰레기 같은 언론이 발표하는 거짓 정보들로 넘쳐나고 있다고 꼬집었다ㅡ 「프랑스여, 그대의 여론은 (...) 권력의 테이블을 떠나지 않으려는 자들의 탐욕스런 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전문 (1897. 12. 14)





졸라는 1898년 <로로르(L'Aurore)> 지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를 기고한다(30만 부 판매)ㅡ 원래는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이지만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가 '나는 고발한다...!'라는 획기적인 타이틀을 붙였다. 그러고는 군사법원과 판사들의 선입견 그리고 불공정한 판결에 대해 토로하며 다음과 같은 기판력(旣判力)의 모순을 추궁했다ㅡ 기판력은, 확정판결을 받은 사항에 대해서는 후에 다른 법원에 다시 제소되더라도 이전 재판 내용과 모순되는 판단을 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 소송법적 효력을 가리키는 법률 용어이다. [①드레퓌스는 군사법원에 의해 반역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 ②따라서 그는 유죄이다. → ③그러므로 군사법원은 그가 무죄임을 선언할 수 없다. → ④그런데 에스테라지(드레퓌스 사건의 진범)의 유죄를 인정하는 것은 곧 드레퓌스의 결백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였으니 드레퓌스 대위의 복권은커녕 재심조차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또한 당시 국방부장관 등부터도 졸라에게까지 명예훼손의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등 정의가 난도질당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평범한 대위 하나가 순식간에 군사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군적 박탈을 당하고, 또 멀리 유배에 보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뒤 재판의 파기가 선언되자 드레퓌스 대위는 다시 프랑스로 되돌아올 수 있었지만 같은 해 재차 유죄를 선고받고(유죄 판결을 두 번씩이나 말이다) 정상참작과 함께 10년의 금고형에 처해졌다. 또다시 1년 뒤, 당시 법무부장관은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반역죄를 제외한 모든 범죄 사실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는 사면법에 관한 법안을 상원에 제출한다. 그러나 이것은 드레퓌스 대위의 완전한 복권이 아니지 않은가. 진실과 정의는 무척이나 더디게 찾아왔다. 6년이 지난 1906년, 드디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완전하고도 전적인 복권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이미 졸라가 죽은 뒤였다). 아나톨 프랑스가 졸라의 장례식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들은 저들이 저지른 사악한 행위들을 알게 되었고 기어이 진실은 오고야 말았던 것이다ㅡ 그러나 보라, 적대적 시위가 벌어질 것을 염려해 졸라의 장례식장에조차 참석하지 못할 뻔했던 드레퓌스는 1908년 졸라의 유해를 국립묘지 팡테옹(Panthéon)으로 이장하던 때 보수 일간지 <르 골루아(Le Gaulois)> 지의 편집인이 쏜 총에 맞는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실천적 지식인의 모범으로 추앙받는 에밀 졸라는 1900년 드레퓌스의 사면법이 가결되기 직전 그와 처음 만났을 정도로 둘은 일면식도 없는 생면부지였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일에 침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고 말한 바 있다. 이제 첫걸음을 떼었으니 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며, 언젠가는 결정적인 마지막 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사실이다.」





▼ 1898년 3월, 졸라의 지지자들은 <나는 고발한다...!>의 발표를 기념하여 메달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모두 1만 683프랑이 모금되어 제작된 순금으로 만들어진 이 메달은 2천여 명의 기부자 명단이 적힌 붉은색 가죽 장정의 노트와 함께 졸라에게 전달되었지만, 그는 아직 승리자의 노래를 부르기에는 이르다는 소감을 밝혔다(훗날 졸라의 부인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 앞면에는 졸라의 초상과 함께 <에밀 졸라에게 바치는 경의>라는 문구가, 뒷면에는 <진실이 전진하고 있고, 그 무엇도 그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에밀 졸라. 1898년 1월 13일>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