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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슬라보예 지젝 외 (한문화, 2003)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 8점
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한문화


뭐, 좀 키치할 수도 있고 동어반복일 수도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숨겨진) 아주 작은 코드를 언급하지 않은 것에서(놓친 것일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우리를 미치도록 궁금하게 만드는 것들을 설명해보려는 시도는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가(물론 우리 역시 매트릭스에 갇혀있다면 아무리 이런 논의를 해도 그 기계들은 코웃음을 흘리고 있을 테지만)ㅡ 토머스 앤더슨/네오와 사이퍼(배신자)가 공존하는 이 미망(迷妄)의 현실세계에서 말이다. 이를테면 네오의 매트릭스 안에서의 이름 토머스/예수의 부활에 의구심을 갖는 제자 '의심하는 토머스', 탯줄 같은 케이블을 뽑아내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네오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육된다'는 점에서의 처녀 잉태, 죽은 네오를 부활시키는 트리니티/trinity(삼위일체), 그들이 타고 다니는 네브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호에서부터 매트릭스 안에서 고치처럼 웅크린 자들의 '인간 발전소'와 같은 모습, 이러한 기독교적 명제와 더불어 불교적 교리까지(휘어지는 숟가락 등). 물론 이것은 영화에 집어넣은 주제들 중의 일부에 그친다. 「나는 이 스테이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 내가 이걸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나의 뇌에다 이게 아주 부드럽고 맛있다고 말해 준다는 걸 알고 있다고. 9년이란 세월을 보낸 후에 내가 깨달은 게 뭔지 알아? 무지가 바로 행복이라는 거야.」 스미스와 교섭하는 사이퍼의 대사다. 만약 우리의 뇌가 나머지 신체로부터 분리되어 커다란 통에 담겨있고 컴퓨터가 전자 충격을 뇌에 보내 이런저런 환상을 불러일으킨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실제 경험을 한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고, 또 사이퍼의 배신이 반드시 잘못된 선택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자유를 갖고 있으려면, 우리는 그 행동을 하지 않을 자유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만약 당신이 무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면(만약 당신에게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것을 할 자유가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지, 자유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p.227) 이 말은 맑스가, 노동과 그들이 생산하는 자본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다. 노동자들은 작업 시간과 작업 방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에서 고용 조건을 받아들여야만 하는데도 그들 자신은 강제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자유 시장'에서 노동력을 자발적으로 팔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오/사이퍼의 선택을 두고서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네오마저도 자발적으로 빨간 약을 골랐다고는 자부할 수 없다. 만약 예언자(오러클)가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면 그 미래 역시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아니겠나. 미래에 발생할 사건을 본다는 것은, 그것이 발생한 동시에(이미 미래를 알고 있으므로) 발생하지 않았다(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ㅡ 게다가 미래가 이미 정해져있다면 모피어스를 배신한 사이퍼의 결심 또한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이 세계가 변화할 뿐이지 그것이 진화나 진보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변화’라는 범주 안에 진화와 진보가 속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조차 수상쩍게 생각한다……. 지젝에 의하면 엘리베이터에 있는 닫힘 버튼은 실제로는 없어도 상관없는 고물이다. 그것은 그저 사람들에게 엘리베이터의 속도를 높이는 데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기여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곳에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결국 문은 닫힐 것이므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빨리 움직이도록 어떠한 행위를 했다는 '거짓 참여'에 빠져있다.(p.315)



덧) 영화는 1999년에 만들어진 단 한 편으로 끝났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네오의 단 한 마디로 요약된다. 「W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