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 (비채, 2013)

· 책_롱 2013. 10. 22. 17:40


안녕, 긴 잠이여 - 8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는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을 읽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신주쿠는 등장인물들을 지켜주는 가이아처럼 여겨진다고 내뱉었던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그곳에서 일 년간 살아 보니 처음 발을 들이밀 때와는 달리 점점 집 밖의 아스팔트가 내 발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산에 오르면 모텔 불빛과 교회 십자가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던 어느 철학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곳이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땅은 아감벤이 언급했던 도시(city)가 아닌 수용소(camp)라는, 시쳇말로 개 같은 기분이 그때는 절실히 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라 료의 경우는 어떨까. 나는 그에게 원한 감정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 억하심정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하리라. 사실 그것은 전작을 쓰고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단순한 조바심에 지나지 않으므로(하라 씨, 사이토 다카오를 본받으시기를) ㅡ 덧붙여 사와자키가 의뢰인, 정확히 말하자면 의뢰인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기까지 100쪽이나 할애하는 자는 하라 료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아예 등장시키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보지 그랬나, 왜?



사와자키가 천이백만 명의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일찍 잠에서 깨고 어느 날에는 또 그 천이백만 가운데 한 명이 된 기분으로 일어나는 메커니즘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연락처도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불특정 다수 ㅡ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사회라는 틀 안에서 호혜 또는 일정한 상호관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할된 개인에 머무는 조건 속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사실)을 준다. 그러나 그가 니시신주쿠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자칫 나이브하게 보일 수도 있을 이런 감상은 모두 깨어지고 만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라면 적이란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라는 슈미트의 말은 일치점이 없을지 모른다. 당연히 사와자키의 세계에서의 적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대방인 동시에 경쟁상대일 게 빤할 것이므로. 「나는 담배를 통해서 증발되기도 하고 집중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사와자키도 무척이나 많은 양의 담배를 피워대고 있으나 우리 또한 반드시 보들레르처럼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담배 대신 다른 것을 넣어보기로 하자. 『안녕, 긴 잠이여』는 일 년 넘게 도쿄를 떠나 있던 사와자키가 겨울이 끝나갈 무렵 ㅡ 시리즈의 첫 작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는 늦가을, 이어지는 『내가 죽인 소녀』에서는 초여름이었다 ㅡ 사무실에 복귀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의뢰인도 아니고 심부름꾼에 불과한 수상쩍은 사내를,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길 원치 않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는 것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라 료는 챈들러가 주장한 리얼리즘 속의 탐정을 재현해내고 있는데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 비열한 거리에서 홀로 고고하게 비열하지도 때묻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남자는 떠나야 한다 (...) 그는 완전한 남자여야 하고 (...) 그는 조직 보스의 여자를 유혹할 수는 있지만 처녀를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비슷한 나이 또래 사람들과 비슷한 언어로 말할 것이다 ㅡ 거친 재치, 그로테스크에 대한 감각, 위선에 대한 혐오, 비열함에 대한 경멸을 표할 것이다.」 이런 판국이니 줄거리를 쓴다는 것은 무의할는지도 모르겠다(실제로 나는 그것을 떠벌이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지나치게 주절대었다). 심지어 내용에 관한 것이라면 온라인 서점의 서지정보나 출판사 홈페이지에조차 친절할 정도로는 나와 있지 않다. 하드보일드는, 이를테면, '하드보일드'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지나친 '담배'에 우리는 무엇을 대입할 수 있을까.



덧) 그럼에도 사와자키 시즌1이 이 작품으로 끝난다는 정보 정도는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사가라로부터 빌린 오만 엔을 어쩔 셈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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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전2권)』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2013)

· 책_롱 2013. 6. 4. 22:44
  • 와, 이거 벌써 읽으셨군요!
    일본 에도물 특유의 낯선 단어와 이름들이 처음엔 좀 불편할 수도 있는데, 몇 권 읽다보면 금방 익숙해져요~ㅎ
    그나저나 저도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BlogIcon 블랑블랑 2013.06.15 14:49 신고
    • 역시 재미있습니다ㅎㅎ 믿고 보는 미미 여사죠ㅋ

      BlogIcon 아잇 2013.06.16 09:44 신고 DEL


진상 - 상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아, 이 책, 두껍다. 해도 해도 너무 두껍다. 두 권 합쳐 1,100쪽이 조금 안 되니까 고래가 숨을 쉬러 물 밖에 나올 때처럼 독자들도 이따금씩 책을 덮고 딴짓을 좀 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뿐이라면 애초 말을 안 꺼냈을 거다. 『진상』, 엄청나게 느리다. 여기에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데, 집어넣은 이야기가 다채로워서 아마도 앞서 말한 '딴짓'은 이 부분에서 다소간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백화만발(百花滿發)이랄까, 그러면서도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삼년불비(三年不飛)랄까, 끝까지 곧장 읽어 내려가면 분명 뿌듯한 감개가 있으리라. 더구나 이만한 분량을 소화해 냈다면 어느 자리에 가서도 당당히 뽐낼 수 있다. 1,000쪽이 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까(사실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 가지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이겠지만 시대물 ㅡ 그것도 '에도 시대물'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독자들이 가지는 반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번이 어쨌느니 마치가 어쨌느니 나가야가 어쨌느니 하는 것들, 거기다가 가게 이름과 수많은 등장인물들까지, 현대물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숱한 고유명사로 인해 자연스레 형성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에 의하면 이 '문제'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음험한 소망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바로 적절치 못한 해결책을 조장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대로 말해서 이 '문제'라는 허들만 넘게 되면 혹은 이것을 '문제'로 취급하지 않으면 꽤 쉬운 형태로 『진상』 읽기에 돌입할 수 있다 ㅡ 친절하게도 책 뒷날개에 등장인물을 따로 모아 놓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것마저 싫다면 그냥 가만히 서서 아웃되는 게 좋을 정도다. 패스트볼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기습 번트를 시도했는데 난데없이 체인지업이 들어와 포수 파울 플라이로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까딱하다간 더블 플레이를 내줄 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지 정보에 '기적의 신약 영묘왕진고(靈妙王疹膏)를 둘러싼 비밀'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잠깐 동안 저 옛날의 '호랑이 연고(tiger balm)'를 떠올렸다……. 어쨌든 그 시절이라고 달랐겠냐마는 일단 신약이니 백신이니 하는 말에는 임상실험, 독과점, 라이선스와 같은 단어들이 뒤따르곤 하는데, 『진상』은 바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 쫄깃한 사리라도 하나 추가하듯 앞서 언급했던 '다채로운 이야기'도 버무려져 있고. 특히 두드러진 것은 ①외모가 남녀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②장남이 아닌 남성의 삶 ㅡ 이 두 가지인데, 어느 쪽이나 볼 안쪽에 스리가 생긴 것처럼 까다롭기 짝이 없다. 무말랭이같이 생겼든 거부감이 들 정도로 잘생겼든 간에, 다소간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미추를 다룬다면 역시나 보르헤스의 문제(음험한 소망)가 끼어들 여지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장남이 아닌 남성의 삶이란 건 또 어떻고. 지금이야 많이 누그러졌을지도 모르지만, '가업은 장남이 이어받는다'는 통념이 있다면 그 형제들은 그저 쓸모없는 터럭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편집자 후기에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ㅡ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는 이 쓸모없는 터럭을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 놓아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증명해냈다. 『진상』은 ㅡ 진상(眞相) 또는 진상(進上) ㅡ 신약 왕진고를 둘러싼 과거의 살인 사건, 남녀의 외모, 장남이 아닌 남성, 이것을 줄기 삼아 읽어 나가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등장인물 개개인의 묘사인데, 외모, 성격, 언변, 무력 등등 꽤 자세하다 싶을 정도로 나와 있어서 흡사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2013』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기야 사스콰치같이 생긴 게 아닌 바에야, 안되는(못생긴) 놈은 뭘 해도 안된다, 안되는(못생긴) 놈은 하다못해 제비뽑기를 해도 안된다, 따위의 말이 통할 리도 없는데다가, 굉장한 미소년으로 그려지는 유미노스케 역시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남성적인 멋은 찾아보기 어려워서 외려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므로, 어찌 보면 이것도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밸런스가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ㅡ 그래서 역시나 유미노스케의 개성보다는 헤이시로의 내레이션 쪽이 더 설득력 있다. 각설하고…… 라기에는 좀 뜬금없지만, 그럼 자, 이제 『진상』을 읽을 시간입니다(더 이상 쓰기가 귀찮은 감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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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히라야마 유메아키 (이미지박스, 2008)

· 책_숏 2013. 1. 1. 12:22
  • 불편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재미는 있죠.
    확실히 인간은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듯요...^^;;;

    BlogIcon 블랑블랑 2013.03.25 21:45 신고
    • 어지간한 소설은 전부 불편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불쾌하지는 않으니 이것도 그러지 않을까요? ㅎㅎ

      BlogIcon 아잇 2013.03.26 10:39 신고 DEL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 - 8점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권일영 옮김/이미지박스


지 (잘) 모르겠어도 좋다_멍텅구리 같은 이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 어째 이 모양인가_라고 해도 재미있는 건 재미있는 것. 나카지마 라모의 『인체 모형의 밤』이 그나마 가닥이 잡힌 모양새였다면 이쪽은 도대체가 왕도(王道)가 보이질 않는다_뭐가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라는 거야……. 하지만 이와 비슷한 기분을 체험한 적이 있는데 바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새벽의 저주》_얼개가 분명하지만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액션이었으니까. 《새벽의 저주》에 관해 내가 들었던 최악의 말은_내용도 없는 이딴 영화_였다. 그럼 이것도_내용도 없는 이딴 소설_이 될 거다.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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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작별』 존 D. 맥도널드 (북스피어, 2012)

· 책_롱 2012. 11. 16. 12:25
  • 이거 벌써 읽으셨군요!
    전 주인공이 배에서 빈둥대며 살다가 돈 떨어질 때만 의뢰를 받는다는 설정이 맘에 들더라구요.ㅎ
    그런 느긋한 면이 저한테 부족해서인지 뭔가 그런 캐릭터에 대한 동경같은 게 있거든요.ㅋㅋ
    그나저나 저 스페셜 CD 음악 괜찮나요?

    BlogIcon 블랑블랑 2012.11.23 22:25 신고
    • CD는 꽤 좋았습니다. 어쩐지 제가 맥기 씨의 배에 함께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ㅎㅎ 시작부터 랩을 막 하시는데, 막, 막……ㅋㅋ 부디 시리즈가 완간됐으면 좋겠어요 정말. 꼭 시리즈나 전집을 기획하면 엎어지는 경우를 여러 군데서 많이 봐서 그런지……;

      BlogIcon 아잇 2012.11.24 10:20 신고 DEL


푸른 작별 - 8점
존 D. 맥도널드 지음, 송기철 옮김/북스피어


Salvage Specialist. 트래비스 맥기의 직업이란다. 그러면서 보수는 의뢰인이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금액에서 경비를 제하고 남은 것에서 절반. 도둑에다가 사기꾼이다. 더군다나 여자까지 후리고 다니는 꼴이라니(자의건 타의건). 섹스와 폭력이 점철된(?) '전설'의 트래비스 맥기 시리즈는 이 『푸른 작별(The Deep Blue Good-by)』로부터 시작한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는 물론이거니와 전체적인 흐름 역시 말랑말랑한 필립 말로와 까끌까끌한 샘 스페이드와도 약간 다르다. 으레 그렇듯 주인공을 도와주는 협잡꾼 장물아비도 하나 등장해 주시고 말이지 ㅡ 이 점에서는 매그레와도 다르군(그럴 수밖에).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구분 짓는 '본격'도 아니니까 그저 능수능란한 문장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배빗』에서 속물 덩어리를 맛보았다면 여기서는 천박(이라면 천박)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하고서. 주인공 맥기를 포함해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마초도 등장하지 않는 본작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영화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주고 있는데, 이 얘기는 꽤 오래전부터 나와서인지 지금은 좀 시들해진 것이 사실이다. 하기야 그의 인상은 미국인의 전형이긴 한데 썩 신뢰 가는 얼굴은 아니라서……. 어쨌거나 맥기가 셜록 홈스를 흉내 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렇게까지 쥐어터질 줄은 몰랐다. 상대방을 끝장내는 것도 참 우악스럽기 짝이 없고. 게다가 맙소사, '찰리네 숯불구이'라니(아마도 Charlie Char-Broil?). 명륜동 막걸리집이나 원할머니 보쌈도 아닌 마당에 찰리네 숯불구이라니!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 급작스런 이스트 터닝이라니! (말년에 유격이라니!) 뭐 우리말로 옮겨놓으니까 당연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좀 구수한 감은 있다. 하여간에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커트 보네거트가 「앞으로 천 년 뒤의 발굴자에게 존 D. 맥도널드의 작품은 투탕카멘의 무덤 같은 보물이 될 것이다.」라는 찬사를 던졌으니 나로서는 차근차근 작품을 읽어나가기만 하면 되지 않으려나. 끝으로, 페미니스트가 맥도널드를 읽으려 하면 절대적으로 말릴 것을 당부하면서.



덧) 아래는 UMC의 「자영이」란 곡인데, 『푸른 작별』에 나오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보니 문득 떠올랐다. (모 사건과는 관련이 없음. 그 사건이 있기 전 만들어진 노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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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마쓰모토 세이초 (모비딕, 2012)

· 책_롱 2012. 10. 9. 16:57
  • 저도 그 '4분가의 트릭'에 도전해보고 싶어집니다.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행복한 수요일 보내세요.

    BlogIcon 풀칠아비 2012.10.10 14:06
    • 자신 있게 권해드립니다. 4분간의 트릭에 꼭 도전해 보시길 :)

      BlogIcon 아잇 2012.10.10 19:03 신고 DEL


점과 선 - 8점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경남 옮김/모비딕


본에 있을 적에 도쿄 역에 있는 초밥집에서 일한 적이 있다. 거기에 야스다(安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내가 깨진 유리잔에 손을 다쳤을 때 「뭐! 세 바늘이나 꿰맸다고!」 라며 우울한 얼굴로 걱정을 해주었다. 게다가 그 사람은 천성이 착했으며 약간 어눌한 기운도 있었다. 『점과 선』에서의 야스다는 정반대다. 이쪽은 철두철미한데 내가 아는 야스다 씨는 일일결산을 볼 때 계산을 틀리기도 하는, 말하자면 영락없는 사오십 대의 사람 좋은 아저씨였다. 도쿄 역 야에스(八重洲) 북쪽 출구께 있는 누마즈 우오가시즈시(沼津魚がし寿司)에 가면 야스다 씨를 만날 수 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여간에 『점과 선』의 야스다는 그야말로 '시간의 천재'로 등장한다는 것. 하루 중 단 4분의 틈을 찾아낸 기막힌 우연은 소설을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일단 이 양반은 소설 첫머리부터 등장하는데, 이때부터 그에게서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것을 독자들도 느끼게 된다(거의 범인을 밝히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읽는 쪽은 그렇다 쳐도, 도리카이와 미하라라는 두 형사의 분투는 정말이지 끈질기기 짝이 없다. 끊임없이 열차가 드나드는 번잡한 도쿄 역 ㅡ 하루 종일 북새통인 13 · 14 · 15번 플랫폼을 무대로, 어떻게 13번 플랫폼에서 15번 플랫폼의 열차가 보이는지 그 4분간의 매직을 밝혀내기 위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라. 뭐, 하긴 미하라는 좀 '안락의자 탐정'처럼 보일만도 했지만 말이다. 긴자의 단골찻집과 노면전차에서 비로소 머리가 번뜩이는 이 사람은 참 한가한 형사라는 소리를 들어도 좋을 정도다 ㅡ 내가 뜨악한 것은, 위키피디아에서 '점과 선(点と線)'을 검색해보면 심지어 미하라에 대한 설명으로 '긴자에 있는 단골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게 취미'라는 결과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진은 『점과 선』에 등장하는 특급열차 '아사카제'다. 15번 플랫폼에 들어오는 이 아사카제 ㅡ 두 남녀가 밀월이라도 떠나려는 듯이 열차에 오르는 모습 ㅡ 를 13번 플랫폼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둘은 나중에 시신으로 발견된다. 도리카이 형사가 식당 칸에서 발행된 것으로 보이는 영수증에 '1인'이라고 써진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발상은 좋았다. 이야기는 도리카이에서 미하라로 그 추리 영역이 옮아가는데(둘은 협력관계) 그게 좀 어설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어설픈 줄거리가 볼만 하다. 미하라 ㅡ 그의 추리과정 ㅡ 는 너무 야스다에 집착한 나머지, 꼭 하나씩 빼먹고서 나중에야 '아차, 그게 있었지' 하며 뒤늦게 느려터진 제 머리를 때린다. 이것은 도리카이가 지적한 '인간이 빠지게 되는 맹점'과,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경찰이라는 이미지를 당시의 시대상과 묶어 보여줌으로써 배가된다. 사족을 좀 붙인다면 『점과 선』을 썼을 당시의 작가와 도리카이라는 인물의 나이는 얼추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데 부러 이런 설정을 통해 그보다 다소 젊은 미하라와의 대비를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미하라가 한 발씩 늦는 것은 완전히 이해 못할 것도 아닌 듯싶다. 그가 수사 공조를 위해 타 지역 수사국에 보낸 전보의 회신만 해도 다음 날 돌아올 정도였으니까. 또 소설에는 공무원의 부정부패가 등장하는데 그 내용이 나오질 않는다. 소설이 연재됐을 당시를 살펴보건대 아마도 군수 물자나 도쿄올림픽에 관련된 사안은 아니었을까 하고 추(억)측해볼 뿐이다. 아, 이 소설의 특징이 하나 더 있다. '해답편' 내지는 '해설편'이 나중에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게 볼 수도 있지만 이게 편지라는 액자를 통해 밝혀진다는 점이다. 도리카이 형사와 미하라 형사가 주고받는 두 통의 우정 어린 편지로 말이다.





『점과 선』은 TV아사히 개국 50주년을 기념해서 2007년에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바 있다. 2부작인데 러닝타임이 4시간 정도 된다. 영상은 서로 나이가 들어버린 도리카이 형사의 딸과 미하라 형사의 재회로 시작되며, 약간 어설픈 감이 있어서 소설로 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비토 다케시 ㅡ 기타노 다케시, 도리카이 형사로 분(扮) ㅡ 특유의 '눈 찡긋거림'이 살아있고(허허……), 시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를 묻는 미하라의 질문에 「살고 싶다」고 대답하는 벙거지 모자를 쓴 이 노형사의 중얼거림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영상물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세이초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는데, 희한하게도 이 소설에서는 약간 의문이 드는 구석이 몇 있다. 의문이든 억측이든 일단 찔러보겠다. 여기서부터는 책을 읽어봐야 이해할 수 있을 텐데 ㅡ ①역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는 보통 대합실에 있지 않나? 그런데 '역 플랫폼이 아니라 대합실로 마중을 나오라고 한 까닭'에 대해 미하라가 생각하는 이유가 나옴으로써 문제는 그의 추리가 아니라 세이초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②초반부에 야스다가 레스토랑에서 나와 도쿄 역까지 5분 만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그것을 설명하며 5시 35분에 레스토랑에서 출발했더니 도쿄 역에는 6시 조금 전에 도달했다는 부분. ③당시를 생각해볼 때 가시이 역(어디라도) 앞의 과일 가게가 밤 11시까지 영업했다는 것도 약간 미심쩍다. 자, 이것들을 상쇄할만한 크나큰 충격이 있을는지? 어쨌거나 나는 범죄의 완성도나 틈 없이 몰아가는 일련의 추리 과정이 매력적인 이 작품은 물론이거니와, 일본의 철도(망)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다.



각설하고, 시간을 해결했더니 사망 장소가 달라지고, 사망 장소를 해결하려니 시간상 범인의 알리바이가 완벽해지는 이 두 번 세 번 꼬아지는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좀처럼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나조차도 '4분간의 트릭'을 깨려고 책과는 별도로 아예 시간표를 따로 만들어볼 정도였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점과 선』이 어떻게 사회파 소설일 수 있는가 하는 갑론을박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트릭 외의 이야기가 있으니 어떻게 봐도 좋다는 생각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트릭에 더 비중이 있다 보니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오히려 여기서의 것이 '알리바이 깨뜨리기'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왜 살인이 일어났는지를, 살인 계획이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나왔는지를, 모든 것이 해결된 후 괴상한 현실의 양태를 봐야 할 것이다 ㅡ 그리고 맙소사, 나는 범인조차 동정해버리고 만다……. 음, 세이초 얘기를 할 때마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멘트도 이제는 식상하군) 중의 하나는 발군의 '제목 짓기'이다. 『点과 線』은, 악마의 시간이 무너져 떨어져 있는 두 개의 点이 비로소 線으로 이어지려는 찰나 또 다른 点이 발견되고 먼저 존재했던 다른 線과 맞닿아 새로운 線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우라질!). 부추기는 건 아니지만 혹 이런 식의 범죄를 기획하고 있다면 하지 않는 게 좋다. 머리가 아플 테니까. 내가 알기로 도리카이 · 미하라 콤비는 '점과 선 2탄' 격인 『시간의 습속(時間の習俗)』에서 재등장한다던데, 이 『점과 선』이 소세키의 '선생님의 유서'(나쓰메 소세키, 『마음』)의 형태인 것에 비해 또 얼마나 멋진 소설일까를 기대하게 한다.



덧) 일본 문예춘추사의 마쓰모토 세이초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판을 본떠, 2012년 한국어판 『점과 선』에도 삽화와 열차 운행표가 수록되어 있다.

posted by 아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