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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안녕, 긴 잠이여』 하라 료 (비채, 2013)


안녕, 긴 잠이여 - 8점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는 하세 세이슈의 『불야성』을 읽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신주쿠는 등장인물들을 지켜주는 가이아처럼 여겨진다고 내뱉었던 말이 떠오른다. 실제로 그곳에서 일 년간 살아 보니 처음 발을 들이밀 때와는 달리 점점 집 밖의 아스팔트가 내 발을 끌어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북한산에 오르면 모텔 불빛과 교회 십자가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던 어느 철학자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곳이 있다. 우리가 발붙이고 있는 땅은 아감벤이 언급했던 도시(city)가 아닌 수용소(camp)라는, 시쳇말로 개 같은 기분이 그때는 절실히 통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라 료의 경우는 어떨까. 나는 그에게 원한 감정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 억하심정이라 하는 편이 더 적절하리라. 사실 그것은 전작을 쓰고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단순한 조바심에 지나지 않으므로(하라 씨, 사이토 다카오를 본받으시기를) ㅡ 덧붙여 사와자키가 의뢰인, 정확히 말하자면 의뢰인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를 만나기까지 100쪽이나 할애하는 자는 하라 료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아예 등장시키지 않는 방법을 강구해보지 그랬나, 왜?



사와자키가 천이백만 명의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듯한 답답함을 느끼며 일찍 잠에서 깨고 어느 날에는 또 그 천이백만 가운데 한 명이 된 기분으로 일어나는 메커니즘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연락처도 알 수 없으며 심지어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불특정 다수 ㅡ 그들이 형식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사회라는 틀 안에서 호혜 또는 일정한 상호관계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할된 개인에 머무는 조건 속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사실)을 준다. 그러나 그가 니시신주쿠에 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자칫 나이브하게 보일 수도 있을 이런 감상은 모두 깨어지고 만다. 당연히 이런 관점에서라면 적이란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라는 슈미트의 말은 일치점이 없을지 모른다. 당연히 사와자키의 세계에서의 적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대방인 동시에 경쟁상대일 게 빤할 것이므로. 「나는 담배를 통해서 증발되기도 하고 집중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사와자키도 무척이나 많은 양의 담배를 피워대고 있으나 우리 또한 반드시 보들레르처럼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담배 대신 다른 것을 넣어보기로 하자. 『안녕, 긴 잠이여』는 일 년 넘게 도쿄를 떠나 있던 사와자키가 겨울이 끝나갈 무렵 ㅡ 시리즈의 첫 작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는 늦가을, 이어지는 『내가 죽인 소녀』에서는 초여름이었다 ㅡ 사무실에 복귀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의뢰인도 아니고 심부름꾼에 불과한 수상쩍은 사내를, 본래의 이름으로 불리길 원치 않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는 것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하라 료는 챈들러가 주장한 리얼리즘 속의 탐정을 재현해내고 있는데 대강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 비열한 거리에서 홀로 고고하게 비열하지도 때묻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남자는 떠나야 한다 (...) 그는 완전한 남자여야 하고 (...) 그는 조직 보스의 여자를 유혹할 수는 있지만 처녀를 더럽히지는 않을 것이다 (...) 그리고 비슷한 나이 또래 사람들과 비슷한 언어로 말할 것이다 ㅡ 거친 재치, 그로테스크에 대한 감각, 위선에 대한 혐오, 비열함에 대한 경멸을 표할 것이다.」 이런 판국이니 줄거리를 쓴다는 것은 무의할는지도 모르겠다(실제로 나는 그것을 떠벌이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 지나치게 주절대었다). 심지어 내용에 관한 것이라면 온라인 서점의 서지정보나 출판사 홈페이지에조차 친절할 정도로는 나와 있지 않다. 하드보일드는, 이를테면, '하드보일드'란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지나친 '담배'에 우리는 무엇을 대입할 수 있을까.



덧) 그럼에도 사와자키 시즌1이 이 작품으로 끝난다는 정보 정도는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사가라로부터 빌린 오만 엔을 어쩔 셈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