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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미국의 송어낚시』 리처드 브라우티건 (비채, 2013)


미국의 송어낚시 - 8점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비채






는 어떤 남자는 『미국의 송어낚시』를 읽으면 이 노래가 생각난다고 했다. <El Pueblo Unido Jamas Sera Vencido>란 제목의 이 곡은 피노체트 쿠데타 이후 칠레 민중의 저항 가요로 널리 불린 노래다. 뜬금없는 소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로부터 발음하기도 힘든 노래 제목을 들은 이후, 나는 줄곧 이 곡을 mp3플레이어에 넣어서 듣곤 했다. 개정판으로 출간된 브라우티건의 소설을 새로이 읽으니 어딘지 모르게 그 남자의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인텔리겐치아나 혁명 따위의 단어를 늘어놓지 않더라도, 이 작품이 실은 전혀 목가적이지 않다는 것을 저 칠레 민중의 노래가 반증하고 있으므로. 더군다나 여기에 시종일관 간섭하는 것이 바로 '송어(낚시)'의 정체와 의미인 것인데, 어쩌면 이탈로 칼비노가 만들어낸 크프우프크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ㅡ 문장 하나하나도 올무 같다. 브라우티건도 이에 대해 밝힌 것이 있다. 「내 소설 속에서 송어는 사람으로, 장소로, 때로는 펜으로 변하는 등 일정한 모양이 없는 프로테우스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이 될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무(無)일 수도 있다.」 칼비노의 그것이 시각적인 이름으로만 존재했던 것처럼 브라우티건의 송어 또한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무엇'임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누구나의 문제다. 내 정체를 추적하려고 열어 본 마트료시카가, 알고 보니 와해되어만 가는 통발 속의 외눈박이였다든지 하는, 뭐 이런 자질구레한 각론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인간의 살아가는 대로의 이야기가 담긴 것이 책이라면, 지금은 반대로 그 책에 나오는 것을 발췌해 인용하며 살고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이니. 그러니 따옴표 역사인 거다(원 웨이 미러의 이편에 있는 것처럼). 하지만 마그마굄, 브라우티건은 그런 것을 찾고 있던 것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민 K가 뭐라고 했었나? 「선생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서울의 달」의 홍식은? 「Boys, be ambitious!」 알다시피 삶은 팩시밀리로 재단되고 세련된 고급 실크로 꿰매지며 뱀이 허물을 벗듯 짤막한 잔상만을 남긴다. 진드기가 식어 가는 숙주의 몸에서 그 죽음을 알아차리고 홀연히 빠져나가듯이. 「넌 좆 됐어!」라고 말하면서도, 매번 홍식이 외치던 것을 그는 송어를 통해 현현되게끔 계획했을지도 ㅡ 오웰의 『숨 쉬러 나가다』는 조금 다르다 ㅡ 그래서 『미국의 송어낚시』는 무척이나 이중적이다(이상야릇한 아이디아뜨iDEATH처럼?). 그가 가장 관심이 많다던 죽음, 폐허, 상실이란 측면에서. 물론 반드시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제 손으로 망친 것을 회복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사족 같지도 않은 사족) 저 노래는 얼마 전 소위 '컨트롤 대란'이 되었던 빅 션의 「Control」(피처링 켄드릭 라마)이란 곡에 샘플링되었으나 샘플 클리어링을 하지 못해 앨범에 실리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