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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진상(전2권)』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2013)


진상 - 상 - 8점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아, 이 책, 두껍다. 해도 해도 너무 두껍다. 두 권 합쳐 1,100쪽이 조금 안 되니까 고래가 숨을 쉬러 물 밖에 나올 때처럼 독자들도 이따금씩 책을 덮고 딴짓을 좀 해야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뿐이라면 애초 말을 안 꺼냈을 거다. 『진상』, 엄청나게 느리다. 여기에는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데, 집어넣은 이야기가 다채로워서 아마도 앞서 말한 '딴짓'은 이 부분에서 다소간 해소되지 않을까 싶다. 백화만발(百花滿發)이랄까, 그러면서도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삼년불비(三年不飛)랄까, 끝까지 곧장 읽어 내려가면 분명 뿌듯한 감개가 있으리라. 더구나 이만한 분량을 소화해 냈다면 어느 자리에 가서도 당당히 뽐낼 수 있다. 1,000쪽이 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으니까(사실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 가지 핸디캡이라면 핸디캡이겠지만 시대물 ㅡ 그것도 '에도 시대물'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독자들이 가지는 반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번이 어쨌느니 마치가 어쨌느니 나가야가 어쨌느니 하는 것들, 거기다가 가게 이름과 수많은 등장인물들까지, 현대물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숱한 고유명사로 인해 자연스레 형성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하지만 보르헤스에 의하면 이 '문제'라는 단어는 근본적으로 음험한 소망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바로 적절치 못한 해결책을 조장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반대로 말해서 이 '문제'라는 허들만 넘게 되면 혹은 이것을 '문제'로 취급하지 않으면 꽤 쉬운 형태로 『진상』 읽기에 돌입할 수 있다 ㅡ 친절하게도 책 뒷날개에 등장인물을 따로 모아 놓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이것마저 싫다면 그냥 가만히 서서 아웃되는 게 좋을 정도다. 패스트볼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기습 번트를 시도했는데 난데없이 체인지업이 들어와 포수 파울 플라이로 죽는 것보다는 나으니까(까딱하다간 더블 플레이를 내줄 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지 정보에 '기적의 신약 영묘왕진고(靈妙王疹膏)를 둘러싼 비밀'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잠깐 동안 저 옛날의 '호랑이 연고(tiger balm)'를 떠올렸다……. 어쨌든 그 시절이라고 달랐겠냐마는 일단 신약이니 백신이니 하는 말에는 임상실험, 독과점, 라이선스와 같은 단어들이 뒤따르곤 하는데, 『진상』은 바로 그것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에 쫄깃한 사리라도 하나 추가하듯 앞서 언급했던 '다채로운 이야기'도 버무려져 있고. 특히 두드러진 것은 ①외모가 남녀 관계에 미치는 영향 ②장남이 아닌 남성의 삶 ㅡ 이 두 가지인데, 어느 쪽이나 볼 안쪽에 스리가 생긴 것처럼 까다롭기 짝이 없다. 무말랭이같이 생겼든 거부감이 들 정도로 잘생겼든 간에, 다소간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미추를 다룬다면 역시나 보르헤스의 문제(음험한 소망)가 끼어들 여지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장남이 아닌 남성의 삶이란 건 또 어떻고. 지금이야 많이 누그러졌을지도 모르지만, '가업은 장남이 이어받는다'는 통념이 있다면 그 형제들은 그저 쓸모없는 터럭으로 취급받기 십상이다(편집자 후기에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ㅡ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는 이 쓸모없는 터럭을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 놓아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증명해냈다. 『진상』은 ㅡ 진상(眞相) 또는 진상(進上) ㅡ 신약 왕진고를 둘러싼 과거의 살인 사건, 남녀의 외모, 장남이 아닌 남성, 이것을 줄기 삼아 읽어 나가면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개인적으로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것은 등장인물 개개인의 묘사인데, 외모, 성격, 언변, 무력 등등 꽤 자세하다 싶을 정도로 나와 있어서 흡사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 2013』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느낌을 받았다. 하기야 사스콰치같이 생긴 게 아닌 바에야, 안되는(못생긴) 놈은 뭘 해도 안된다, 안되는(못생긴) 놈은 하다못해 제비뽑기를 해도 안된다, 따위의 말이 통할 리도 없는데다가, 굉장한 미소년으로 그려지는 유미노스케 역시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남성적인 멋은 찾아보기 어려워서 외려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므로, 어찌 보면 이것도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밸런스가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ㅡ 그래서 역시나 유미노스케의 개성보다는 헤이시로의 내레이션 쪽이 더 설득력 있다. 각설하고…… 라기에는 좀 뜬금없지만, 그럼 자, 이제 『진상』을 읽을 시간입니다(더 이상 쓰기가 귀찮은 감도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