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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흔적 없이 사라지는 법』 프랭크 에이헌 (씨네21북스, 2012)


흔적 없이 사라지는 법 - 8점
프랭크 에이헌 지음, 최세희 옮김/씨네21북스


만의 생각이긴 하지만, 어쩐지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은 것 같지는 않다. 그다지 회자되지도 않은 느낌이다. 물론 온라인과 현실의 삶은 많은 차이가 있으나 어찌 됐건 풍문으로 듣건대 독자들에게는 그다지 큰 어필은 하지 못한 것만 같다. 다들 흔적 없이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걸까?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집이 있고 직업이 있는 자들도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그들에겐 이 세계가 마냥 아름답기만 해서 어떻게든 돈을 벌게 해 주는 사장에게 목매달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일까? 글쎄, 그건 그냥 팍팍한 현실일 뿐이고, 이 책은 단순한 흥미만으로도 읽을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ㅡ 아니면 나 혼자만 현실에서 큰 재미를 못 보고 있는 것일지도. 프랭크는 스킵 트레이서(skip tracer)다. 스킵 트레이서란 다른 사람들을 추적해 개인정보 캐내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말한다. 상습 전과범, 빚쟁이, 법정 소환장을 받은 목격자, 그 밖에 도망칠 궁리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추적 대상이다. 그는 어떤 일(책에 나온다)을 계기로, 아예 종목을 바꾸어 이 책을 썼다(사실 같은 맥락일 테지만).





가정부   여보세요?
프랭크   안녕하세요. 저는 택배사 UPS의 팻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X씨에게 지급된 수해복구 패키지를 전달해야 하는데요.
가정부   음…….
프랭크   본인이 서명을 해주셔야 해서요, 언제쯤 들어오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가정부   그게.
프랭크   괜찮습니다. 물품 반송도 가능하거든요.
가정부   (묵묵부답)
프랭크   제가 그냥 알아서 처리할까요?
가정부   아, 아뇨. 이리로 보내주세요.
프랭크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찾아뵙고 사인을 받을까요?
가정부   6시쯤이면 오실 거예요.
프랭크   감사합니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성관계를 맺은 모니카 르윈스키를 잡았다. 너무 간단하지 않나? 그럼 쫓는 것이 아니라 쫓기는 입장에서 도망치려면? 어떤 상황이라도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잠적에 임하려면 가장 먼저 신경 쓰이는 것은 주거 조건이다. 일단 신용 기록 조회를 피하는 최고의 방법은 부동산과 대출회사를 피하는 것일 텐데, 현대인의 삶에서 대출이란 잘 튀긴 닭 한 마리와 맥주의 관계와도 같아서 멀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인을 만들라. 부동산 중개인이나 세를 놓는 사람에게 당신의 회사가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고 말하고, 공공 서비스와 케이블 방송 역시 법인 명의로 개설한다. 더 좋은 방법은 집주인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하는 주거 조건을 찾는 것이다. 집 전화는 설치하지 말고, 목숨이 위험한 경우에만 이 역시 법인 명의로 개설한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은 금물이다. 선불 휴대전화나 선불 신용카드(카드사를 통해 발급과 충전이 가능하다), 콜링카드(후불제 장거리, 국제전화용 카드), 가상 전화번호(국내에서는 한 달에 2천 원 정도라고 한다)를 써라. 이 모든 게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들 것 같다면 은행, 웹사이트, 각종 고객 상담 부서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정보를 바꾸고, 선불 휴대전화를 살 돈마저 없다면 동전 몇 개로 공중전화를 이용하길. 운전을 할 때는 딱지를 떼지 않도록 안전하게 하고. 이 책에는 이외에도 허위정보 유포하기, 소셜 미디어 안에서 잠적하기, 나라를 떠나 잠적하기, 위장자살 개론, 심지어 아예 잠적하지 않고 사는 법까지 적혀 있다. 나는 가능하다면 나라를 떠나거나 위장자살을 한번 해 보고 싶은데, 가진 돈이 없으니 이 방법은 무리다. 그러나 당신이 부자이고, 아들이 당신의 돈을 가로채려 한다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