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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아서 코난 도일 (북스피어, 2014)


J. 하버쿡 젭슨의 진술 - 8점
아서 코난 도일 지음, 송기철 옮김/북스피어


찮은 넘버링 000부터 시작해서 007번이자 8권 째인 『J. 하버쿡 젭슨의 진술』까지 왔다. 솔직히 말해 코난 도일은 그간 (어쩔 수 없이) 셜록 홈스를 제외하면 물음표만 둥둥 떠다니는 작가였다. 정말이지 감가상각 없이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의 수상쩍은 작품집이 출간되었고, 내용마저 머리를 싸맨 채 범인을 밝혀야 하는 '추리물'이 아니었다. 해양구조 컨설턴트(salvage specialist)를 표방한 트래비스 맥기도 아닌 바에야 '해양 미스터리'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기에는 다소 느른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출판사 사장님의 인용을 일부 재인용하자면ㅡ 망망대해를 느릿하게 떠도는 배 한 척, 선장도 선원도 없고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그러나 평온한 상태로 발견된 마리설레스트 호의 실화를 바탕으로 코난 도일이 소설을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ㅡ 뭔가 악몽 이면의 실상/실상 이면의 악몽이라든지, 책을 펼쳤을 때는 보무당당했지만 정작 다 읽고 난 뒤엔 희열에 찬 죽상을 하게 되더라도ㅡ 이 책을 끝장 보지 않으면 일종의 부작위범이 되어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될 것만 같다는 말도 안 되는 정념에 휩싸이고 말았다. 어딘지 모르게 말레이시아 실종 항공기처럼 소설 같은 현실을 마주한 터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공포를 탐구하는 데는 포의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다. 목침으로 제격인 『우울과 몽상』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맛보았던 흉흉한 정신 상태까지는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이야기의 구성과 전개는 기가 막히다. 특히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수록된 단편 「가죽 깔때기」를 최고로 꼽고 싶다. 가죽으로 만든 깔때기라는 것도 괴상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ㅡ 라이어넬 데이커라는 사위스런 취미를 가진 남자를 등장시켜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것처럼 음험한 묘사를 잔뜩 늘어놓고는 끝에 가서 '꿈'으로 매조져버리더니, 이번에는 다시 현실의 가죽 깔때기로 돌아오는 모양새가 짐짓 존 딕슨 카의 『화형 법정』 읽기로도 이어질 수 있겠다는(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본 이야기 역시 당연히 재미있고. 바다 한가운데서 발견된 주인 없는 선박, 마녀 재판, 미라와 동방의 언어, 차가운 고립의 공포 이 네 가지를 주제로 한 단편집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지만 그것이 코난 도일의 소설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재차 말하지만 셜록 홈스의 망령에 사로잡힌 현대인에게 도일의 시리즈 외 작품이라는 것은 상당히 놀랄 만한 일일 테니까.



책 말미에서 발견한 사장님의 변

: 많이 팔릴 만한 종류의 시리즈가 아니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내고 싶어서 냈어요. 팔리면 팔리는 대로 안 팔리면 안 팔리는 대로 이 시리즈는 계속 낼 생각입니다. 좋아하거든요, 이런 내용의 글을. 다만 시리즈 가운데 몇몇 권은 재쇄를 찍을 여력이 없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말인데, 절판되기 전에 사두시면 좋겠습니다.



덧) 난 몽땅 가지고 있지요. 메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