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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2012)


제노사이드 - 8점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황금가지


요시유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에는 '뉴타입(new type)'의 개념이 등장하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으로부터 새롭게 발현된 정신능력, 제6감, 초능력, 텔레파시, 천리안 등의 공감각(共感覺) 능력에 대한 것이다. 아니면 《인랑》 ㅡ 이것을 예로 드는 것은 좀 꺼려지지만 ㅡ 은 또 어떨는지. 이른바 '평행세계(parallel world)'를 도입했으니까. 이것도 아닌가? 그럼 브라이언 레반트의 《베토벤》은? 그야말로 '슈퍼 개'가 주인공으로 나와 불법 동물실험을 하려는 작자에게 한방을 날리는 영화 말이다. '인류보완계획'을 내세운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또 어떻고……. 『제노사이드』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집착하던 신기루 같은 이야기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와도 비슷하게. 인간 탐구의 방법론과 접근법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이 소설에서의 방식은 진부하면서도 흥미로울 수밖에 없는 길이다. 겉표지에 적힌 문구처럼.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모럴 해저드인가? 모럴 해저드 위의 단계를 차지하는 인간의 해이인가? 어설픈 앙팡 테리블 취급을 하는 조야한 인간의 불가해성인가? 『제노사이드』는 걸작이건 졸작이건 둘 중의 하나라고 본다. 어중간하지는 않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러저러한 단점도 눈에 띄지만. 일단 통신이나 위성, 해킹에 손을 대는 '아키리'가 과도하게 전지전능한 모습을 지녔다는 것. 이것은 신인류의 능력, 위에서 말한 뉴타입이란 걸로 해결이 된다고 여겨야 할까. 이래서야 속 편한 결론이지만. 다음은 결말인데, '기프트'란 제약 프로그램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사라지게 ㅡ 기프트(gift, 천부적인 재능)를 다 하고 ㅡ 되어있다는 설정이다. 이런 식이라면 애초에 이 이야기 자체가 발생하기 힘들다고도 보이지만 당최 일관성은 없어 보인다 ㅡ 일본의 독자들이 반응하는 단순한 전쟁관이나 편향된 역사관(이건 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한국인이라서일까?)은 다소 쓸데없는 논란이라고밖에 보이지 않으니 차치하고 넘어가자. 처음부터 영화화를 목적으로 했는지 어땠는지 소설은 할리우드식 SF의 면모도 있고 또 등장인물 고가 겐토가 과거 냉전 시대의 이야기를 듣고는 '마치 SF 같았다' 라고 느끼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오히려 현실이 SF다!). 그러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어느 인터뷰에선가 말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다면 허술한 액션영화밖에는 안 된다.」 이 작품은 절대 영화화할 수 없다는 단언(혹은 자만)일 수 있겠지만 인터뷰의 전반적인 내용을 훑어보면 텍스트를 손에 쥔 자의 자신감과 약간의 겸손이 들어가 있다. 「전투 장면은 소규모적인 것이 두 군데밖에 없다 (...) 그것을 언어의 힘을 빌려 긴박감을 더해 인물의 감정과 영상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인류사를 담아 (...) 인간의 잔학 행위를 영상으로는 만들기 어렵다…….」 자, ①아키리의 설정이 너무 초인적이라든가, ②스케일이 '너무 커서' 지친다든가, ③용병으로 등장하는 예거의 돈을 필요로 하는 동기가 진부하다든가(파편적으로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생각나서), ④뜬금없이 한국의 '정(情)'이 나온다든가 ㅡ 하는 것은 집어치우겠다. 이런 면면은 기술적인 곁다리로 보고 좀 크게 가자.





인간에게 선한 측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네. 하지만 선행이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되는 행위이기에 미덕이라고 하는 걸세.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당연한 행동이라면 칭찬받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ㅡ 본문 p.475




왜 '신약 개발'인가. 10만 명의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이것은 소설 전반부에 나오는 '피그미족 캉가 밴드 40명의 격리 또는 사냥' 혹은 '신인류의 탄생'과 외려 대치되기도 하고 병립되기도 한다. 여기서 이런 알고리즘이 발생한다. 하이즈먼 리포트 #5 '인류의 진화' ▶신인류 '누스(아키리)' 탄생 ▶신약의 필요, 누스의 신약 개발 돌입(현인류의 능력 밖이므로) ▶위험하다고 판단한 현인류의 누스 말살 정책 ▶누스의 반격 ▶신약 개발 완료 ▶누스 말살 정책 폐기(누스의 지력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그가 사라졌다고 판단) ▶현인류의 불치병 치료 ▶평화(▶다시 처음으로?). 신인류가 현인류를 구한 셈이다. 훗날 현인류를 '갈아엎고' 신인류가 현인류로 대체되고 다시 또 언젠가는 새로운 인류가 나타난다든가 하는 결말까지는 가지 않는다(당연하다). 그러니까 단지 피라미드의 꼭대기가 아니라 맨 밑에서부터 위 끝까지 아우르는 의미에서 ㅡ 「너 = 나 = 우리 = 인간 = 너 = 나 = 우리……」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웅대한 철학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분히 허영에 사로잡혀있고 자기중심적이다.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기보다 탐욕, 잔혹, 자만으로 가득 차있는 존재다. 인간은 결코 지적이지 않다. 인간의 윤리적 기초에 동정심이 존재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약 전자라면, 그것은 학습된 사회적 반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이런 사유 속에 『제노사이드』는 생명의 논리를 들이민다. (포괄적으로 말한다면)단순히 인간을 후손을 낳는 생존 기계로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그런 끊임없는 생산과 생존만이 진화하는 것이라고 여겨야 하는가의 문제를. 하지만 어떤 경우든 미지의 외부 존재와 마주쳤을 때 쾌감 혹은 불쾌를 겪는 문제가 간섭한다. 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금방 죽을 수밖에 없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 고바야시 마이카, 그리고 처음부터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태어난 아키리와 에마(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것도, 그것을 다수와 소수로 나누는 것도 우리는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저 옛날 스토아학파의 한 철학자의 중얼거림을 들어보자. 「신이 지금 질병을 나에게 정해 주었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다면, 나는 질병을 추구했을 것이다.」 말인즉슨 삶에 초연하고, 불리한 입장에서 분노하지 않고, 행운을 맞이해도 쾌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인간(우리)은 절대, 그럴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안다. 왜? 인간은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착하고 고통 받는다. 첫 번째 논의 ㅡ 소설 초반부의 캉가 밴드를 놓고 하는 입씨름은 그래서 괴로운 물음이다. 나을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로 왜곡되어있다)을 죽일 것인가 격리시킬 것인가. 아니, 애초에 어떤 물음을 던져야 하는가. 두 번째 논의 ㅡ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하지 못하고 개인의 이성만을 신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질문. 과거의 홀로코스트나 현재의 다발적 전쟁은 같은 이름이다. 그래서 다시 돌아간다. 「어째서 우리는 인간끼리 서로 죽이고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지금쯤 세계 종말 시계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