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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장미의 이름(전2권)』 움베르토 에코 (열린책들, 2000, 신판)


다시피 세상 모든 건 점, 선, 면, 체를 이루며 움직인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대로 기억이란 콩나물 비빔밥 같아서 나는 무엇이 어떤 점이었는지 뭐였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비록 스트레스 해소와 데시벨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장서관 미로의 비밀을 알아냈을 때 윌리엄의 외침은 점, 선, 면, 체 모두를 꿰뚫는 환희의 데시벨, 그것이었으리라 ㅡ 화국和局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던 애매모호한 장서관의 여행, 그리고 쾅, 머리를 뒤흔듦, 이것들을 생각해보라 ㅡ 마치 여유로움의 벼락부자가 된 듯이. 에코의 다른 저작에서도 '집단에서 함께 오줌을 누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거나 간첩'이라 하지 않았나. 이것으로 보건대 당시 윌리엄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환희에 찬 지식의 도둑이었음에 틀림없다. 단순한 추리 소설이라 하기엔 아까울지 몰라도, 어쨌든 『장미의 이름』의 포장지는 그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로지 어떤 하나의 구심점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또한 아니다. 시종일관(정확하게 말하자면 처음부터) 음습하게 그려지는 수도원이 현실 세계라 한다면 「시학 2편」이 주는 의미는 뻔하다. 여기서 호르헤는 지식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 리 없다며 '탐구'가 아닌 '보존'을 역설하면서도, 희한하게도 동시에 성경에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파기되어야 한다면서 「시학 2편」 필사본을 제 입에 넣고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말하는 '보존'으로부터 그의 이데올로기는 붕괴된다.


한편 『장미의 이름은』, 니체의 '영겁회귀'와 닮아 있는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종교에의 비판, 중세의 폐쇄성, 현실 세계에 던지는 독설을 조금씩 버무려 놓은 듯한데, 이것은 고착된 사고를 수용할 때의 거북스런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서관(크게는 수도원과 현실 세계)은 코스모스처럼 보였다가 카오스로, 다시 카오스모스로, 결국에는 블랙홀로 불타버리고, 그런 일련의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수도사들 또한 처음에는 피라미드 꼭대기의 그것으로 인식되지만 점차 토악질을 해대는 부랑자처럼 변모한다 ㅡ 이것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표현되며, 그런 의미에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성 앙투안느의 유혹』에서 「내가 그 모든 것들이야! 나는 내가 실체임을 느껴! 나는 사유야!」라는 대목은 참 좋았다고 생각되는 동시에 성직자들의 일면을 보여주기에도 적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피라네시의 동판 작품들 중에는 공상과학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마치 『장미의 이름』에서의 장서관의 구조처럼. 파국의 징조를 보이던 장서관처럼, 피라네시의 작품들은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구별이 잘 가질 않는다 ㅡ 피라네시에서 보르헤스(특히 「바벨의 도서관」)를, 보르헤스에서 『장미의 이름』이 연상되듯 말이다.



장서관은 하늘거리며 둥실 떠다닌다. 당연히 책들도 함께 부유하여 여기에서 저기로 돌아다닌다(실제로는 그 사상들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가 그를 모르게, 그들이 그들을 모르게, 텍스트와 사상이 제 자신을 모르게 물리 해석에 시달리면서 말이다.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도 하기 힘든 탑들의 어느 틈에서, 밖 ㅡ 반대로 안이라 해도 좋다 ㅡ 을 향한 커다란 유리창에 비친 그들이 제 자신을 보고 있는 거다 ㅡ 담뱃갑 같은, 욕망으로 발기되어 솟은 탑의 노예로. 고어 비달이 그랬다.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망해야 한다」고. 마치 호르헤를 두고 한 말 같다 ㅡ 끝에 공든 탑이 불타지 않았나. 아무래도 그는 '한 명의 적은 너무 많고, 백 명의 친구는 너무 적다'란 말은 알았어도 '친구는 가까이, 적을 더 가까이'란 격언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영화 《장미의 이름》 : 불타는 장서관에서, 윌리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