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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이방인』 알베르 카뮈 (열린책들, 2011)


『이방인』을 두고 페이거니즘의 세계를 느낀다면 그거야말로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위의 도덕을 강요하는 인간들, 전통적 가치의 옹호자들에 의해 사람 한 개(個)가 검토되고 남이 나를 대신하는 소외감. 카뮈가 「사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릴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사회 질서란 이름으로 소외당하는 이방인의 삶의 진실성을 자각하게 한다.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진실성과 허위의 문제를 그 전체적인 넓이 속에서 취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달리 말하면 허위의 도덕을 무시한 작용은 본질적으로 사회로부터 거부당한다는 거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혹은 잘 모르지만 응당 그러한 척, 서로 사회적 관습의 교환을 바라는 여러 가지 집단의 구성원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 만들어진 것이 사회다. 그러나 자기에게 성실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사람, 자신만이 스스로에게 유일한 벗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 대한 가치부여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과 자신의 괴리를 진실되게 인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부조리하고 병균 같은 이방인으로 각인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잘)설명할 수 없지만 이러한 ‘자연스런 감성’이 ‘자연스런 자각’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은 안다. 왜냐하면 문학의 세계에서는 아주 단순한 묘사,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진다는 터무니없는 텍스트라 할지라도, 모든 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여지기 이전에 이미 저들 스스로도 생각해왔을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지정한 0℃, 물이 얼게 된다는 그 0℃가, 어째서 0℃인가, 그것은 편의상 ‘그것이 편하고 깔끔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어떠한 전통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적 기준이나 통념을 바꾸면 대체 어느 정도 차가워야 0℃에 가깝고 어느 정도나 기온이 올라가야 일(열)사병에 걸릴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그러니까 저 특권자들이 만든 인간 피라미드가 0℃ 밑의 차갑고 성실한 삶을 (부조리한) 도덕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결론은, 뫼르소처럼 개죽음을 당하지 않으려면 ㅡ 당사자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ㅡ 우리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어야만 한다는 거다. 사람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모든 삶이 어쟀든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법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삶도 전혀 싫지 않다고(p.63), 그리고 삶이 그다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지금 죽든 20년 후에 죽든 어쨌든 죽는 것은 항상 나였다, 다만 추론을 하면서 그 대목에 이르렀을 때 약간 곤란했던 것은, 앞으로 살 수 있을 20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어마어마한 흥분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는 점(p.159), 당신(사제)이 말하는 신, 사람들이 선택하는 저마다의 삶, 그들이 고른 운명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뭐가 중요할까, 유일한 하나의 운명이 하필 나 자신을 뽑아들어야 했고, 그럼으로써 나와 더불어 무수히 많은 특권자들까지도 한꺼번에 자동으로 선택했는데(p.169), 하고 담담하게 때로는 격노하여 내뱉는 뫼르소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덧) 소설 속에서는 뫼르소의 의모가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죽은 어머니의 친구였다고 하는 토마 페레의 생김새는 굉장히 세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건 우연일까 의도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