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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아홀로틀 로드킬』 헬레네 헤게만 (열린책들, 2010)


군가의 서평처럼 ‘확실히 완전히 개운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Ctrl+C와 Ctrl+V만으로는 세상만사가 탈 없이 흘러가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이기주의적이고 무신경한’ 열일곱의 작가는 본문에서 이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혹은 그렇지만, 이 문제는 여기서 가차없이 빼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왜 이다지도 극찬을 받고, 미프티는 (맙소사!) 세상의 모든 원죄를 혼자서 짊어진 얼간이가 되었는가에 대한 감흥은 책 겉표지의 새빨간 아홀로틀로 대신하자. 나는 죽었다 깨도 미프티처럼은 될 수 없다. 심하게 탈골된 언어를 구사하며 마치 카타콤에 갇힌 로마 병사처럼 기는 그녀의 삶은, 당최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미프티는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미군기지 근처에 사는 소녀로 대체되어도 무방하다. 미프티의 트라우마가 진짜이든 그렇지 않든 그녀를 설명하는 모든 단어 앞에는 수식어로서 ‘탈(脫)’이나 ‘반(反)’을 붙이는 것도 좋겠다. 『아홀로틀 로드킬』은 성장 소설보다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착한 어린이들’의 성장을 저해하는 불온서적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이렇게 일관되게 악마적일 수는 없다) ㅡ 이것은 다양한 의미로 그렇다는 얘기.



왜 다른 사람들은 너의 염병할 시야에

단 한 발짝도 들어설 수가 없는 건데?


ㅡ 본문 p.43



그래. 우리(나)는 ‘너(미프티 혹은 헤게만)의 염병할’ 시야에 단 한 발짝도 들어설 수가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좀처럼 진행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지 않고는 인간은 자신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조르주 바타이유, 『문학과 악』)는 말처럼. 알 수 없는 어긋남, 통찰력을 잃고 더쳐가는 상처들. 이것들은 작위성이나 상투성, 비개연성이란 말로는 쉬이 해결될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봉합’이 안 된다는 거다. 헤게만의 연출력은 평면적이지만, 붕괴, 그 직전이다. 그래서 미프티에게 유토피아란 없다. 오로지 자신의 영역 안에서만 우주적으로 변할 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보편의 문턱을 넘어 버린, 착한 어린이는 될 수 없는, 반추상의 구어체로 이야기하는 미프티만 남는다 ㅡ 내가 분명 한 권의 책을 읽었음에도, 에로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게다가 미프티는 좀먹은 행려병자 꼴을 하고 ‘자동 응답기의 부재중 전화 표시를 보고서, 언젠가 죽으면 자신의 일부도 이렇게 남아 있게 되리라’(p.300)는 것을 알고 있다(물론 우리도 안다). 상당히 불쾌하고 조금은 위악적이며 동시에 순수한, 쉽사리 로드킬 같은 건 당하지 않을 미프티 ㅡ 시속 120km로 달리는 차에 스스로 뛰어들었으면 뛰어들었지. 헤게만의 실험은 텍스트를 그러모으는 것에 더해 그녀 자신을 해부하는 거였다. 그래서 문득 생각나는 음악은 블러드하운드 갱의 「Foxtrot Uniform Charlie Kilo」가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