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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펭귄클래식, 2009)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매력은 다양한 해석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ㅡ 거의 절망에 가까운 상태였으므로. 우리는 때때로 20세기를 후기 니체 시대라 부르기도 하지만, 니체를 둘러싼 니힐리즘과 위버멘쉬로 위시되는 철학과 이론은 광시곡의 그것과 같았고, 심연의 장막 밖에서 비트적거리는 무분별한 말들이었다. 날카로운 파토스 위에서 위태위태하며 분출되는 메타포들은 사유의 침식과 퇴적을 거쳐 다시 융기를 향해 떠오르는 기암괴석이나 다름없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차라투스트라가 지극한 행복의 섬에서 사라지자 군중은 그가 악마에게 잡혀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오히려 차라투스트라가 악마를 잡아갔을걸’이라며 웃어넘긴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러고도 남았을 위인이다(악마가 존재한다면). 그래서 「입을 다물라. 너 위선적인 개야! 그대와 같은 종류를 그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p.223)라며 자기부정과 극복을 꾀한다 ㅡ ‘홀가분한 죽음에 대하여’라는 장은 그래서 괴팍하고도 진실된 웃음이 난다. 때로는 엉켜버리고, 그래서 인간은 다리를 절고 목을 삐끗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텍스트는, 그게 무엇이든 순식간에 부정되기 일쑤다. 그리고 다시 자기극복을 한다(끝도 없이).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신이다. 그러나 나는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죽었다.’ 이건 간략한 비유에 불과하지만 책을 여는 순간부터 쏟아지는 온갖 암시와 느낌표(!)들은 머리를 아프게 한다. 그의 말을 빌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하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때로 니체를 허무주의자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유는 절대 허무주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함’을 신랄하게 까발린다. 도덕(흔히 기독교적인)과 선과 악의 관념들이 아니라 ‘힘에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에게 묻는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조차 자의적인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지시로 인해 휘둘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