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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권력과 영광』 그레이엄 그린 (열린책들, 2010)


는 단편의 조각들로서 『권력과 영광』을 기억한다. 그리고 책을 손에 쥐고 있던 내내, 영화 《바그다드 카페(Out of Rosenheim, Bagdad Cafe)》의 쟈스민과 브렌다가 이 작품의 위스키 사제와 경위로 겹쳐 보였다 ㅡ 심지어 영화에서 울려퍼지던 음악까지도(「콜링 유(Calling You)」). 황량한 사막과 황량한 마음은 그 노선을 같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위스키 사제와 딸’이라는 것돠 ‘위스키 사제와 경위’라는 이 두 가지 명제는 같이, 그리고 달리 생각되기도 한다. 살지만 살지 않는 것, 죽지만 죽지 않는 것. 위스키 사제의 모호한 의지와 경위의 숙연함은 살아지면 살고 죽어지면 죽는다는 논리와도 비슷하다.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썼다. ‘그 어둠을 통과해 본 자만이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 어둠에서 가져온 모든 것은 외부 세계의 밝음 속에서는 무용할 뿐이다.’ 라고. 자살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위스키 사제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이 말은 꽤나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못 박힌 자는 다시 못질을 당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새로이 못에 박힌다. 그들 ㅡ 사제와 경위 ㅡ 의 역할극은 일종의 체화된 소통을 보여준다. 죽고 죽이고, 잡고 잡히고, 쫓고 도망치고…… 이 과잉과 과소의 인물성은 보다 포괄적이며, 흔적의 소멸과 은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권력과 영광』은 어차피 그것이 자연스럽게 ‘권력’과 ‘영광’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 자체의 모호성은 자명하게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호함을 느끼는 것은 단순히 상징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물의 행동과 대사, 사건의 진행 등을 통해 구축된다. 위스키 사제는 자꾸만 용서하지 못하고 혼혈인을 꾸짖다가 금세 이런 말을 한다 ㅡ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소.」(p.314) 그러다 사제는 경위를 만나서는 「난 항상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소. 나 자신의 죄를 스스로 사면할 수 없을 뿐이지.」(p.328)라며 목적을 상실하고 고갈된 세상에 떨어진 사람이 된다. 파워(power)가 권력으로 해석되든 권한으로 해석되든 영광(glory)에의 과정에서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는지…… 위스키 사제는 정말 신부였는지 아버지였는지(father)……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를 알 길이 없는 위스키 사제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독수리들이 대가리를 햇볕에 내놓은 채 지붕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배경으로 기세 좋게 해먹에 누워 있는 위스키 사제를 상상해볼까. 그 여정의 첫 페이지를 여는 순간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네, 「부에나스 타르데스(Buenas tardes).」 ㅡ 그리고 사제여, 오지 않을 평화로운 당신을 위해 「콜링 유」 한 소절이나 부르겠소,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