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추리는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수준이기 마련이죠.
그런데 매그레는 범죄의 모순에서 출발해 인생을 이해하려 합니다.ㅡ 『매그레 반장, 삶을 수사하다』 p.212 번역가 최애리 님의 말
우리 곁엔 언제나 ‘중환자들’이 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ㅡ 혹은 나일 수도 있고, 그(녀)들은 복수를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행복을 누릴 온당한 권리가 있으며 실수를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다. 『누런 개』에서 엠마는, 혹은 ‘또 한 사람 X’는(그렇게 외로운 사람들은) 인위적이고 차가운 낭패를 맛본 세월을 보내며 생기발랄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상처의 처분을 그대로 바랐었다. 마치 삶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처럼. 토마스 만의 단편 「굶주리는 사람들」에서 젊은 예술가 데틀레프가 썼던 글을 생각해보자. ‘그리워하는 것은 정상적이며 예의 바르며 사랑스러운 영역입니다. 삶은 매혹적일 정도로 진부한 것 속에 있는 겁니다…….’
……밝게 빛나는 화려한 옷, 카페에서 시시닥거리는 연미복의 웃음들 따위도 좋겠지만, 그 누런 개, 사랑스런 조그만 강아지가 커왔던 5년이란 시간이야말로 정상적이고 사랑스러운 날들이었어야 마땅했을 일이다. 그런데 왜 꼭 세상은 누군가가 ‘쥐어 터져야만’ 직성이 풀린단 말인가. 이것을 단순히 니체의 gut과 böse 둘로 나누지는 말자. 왜냐하면 인간이란 언제나 자기만의 정해진 궤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엠마는 잔혹성의 또 다른 극단을 향한 생활을 보냈고 X는 외부에서 오지 않는 구원을 좇아 엠마에게 당도했다. 그래서 그들의, 중환자들이 가진 상처만이 어두운 힘으로 표출된다. 인간의 야생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다시 새로워질 수 있는 어떤 행복’에서 기인하기 마련이니까. 이상 지나친 비약에 근거한 확대해석일 것이 분명한 장광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