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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W 또는 유년의 기억』 조르주 페렉 (펭귄클래식, 2011)


가 로베르토 볼라뇨는 「음경이 발기했을 때 길이가 적어도 30센티미터는 되는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쓰는 한, 나는 자서전에 대해서는 어떤 반감도 갖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럼 조르주 페렉은?

② 유년기에 대한 기억이 없지만 차례차례 하나씩 끄집어내는 페렉의 서술에, 우리는 거기에 조금은 낯설게 빠져든다. 그러므로 얼마간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③ W에는 승패는 필요 없고 운이라는 요행이 난무하지만 실은 그것보다 곪아터진 상처만이 더쳐갈 뿐이다.

④ 유년의 기억이 과연 W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⑤ 작가가 처음 연재할 때 ‘꿈’이 가득한 소설이라고는 했지만 대체 W에 꿈이 어디 있단 말인가?

⑥ 볼라뇨의 말대로 페렉이 30센티미터의 발기된 음경을 소유했건 그렇지 않건, 그의 ‘유년의 기억’은 말소된 것임에 틀림없다.

⑦ 결국 W는 꿈이 존재하지 않는 디스토피아이며, 페렉 ‘개인의 W’가 아닌 ‘모두의 W(orld)’로 봐야 할 여지가 충분해 보인다.

⑧ 자서전임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수많은 각주를 보라, 과연 진실일까?

⑨ 아우슈비츠에서 왼쪽 팔뚝에 ‘174517’이라는 번호를 노예문신처럼 새겨야 했던 프리모 레비가 간명하고 담담하다면, 역시 같은 곳에서 어머니를 잃은 페렉은 우아하고 기괴한 ‘낯설게 하기’를 꾀함으로써 그 실타래를 촘촘히 엮는다.

⑩ ⅩⅩⅦ에서 페렉은 여자아이를 벽장에 가두고서(발단이야 어쨌든) 고백하기를 거부하지만 결국 벌에 쏘이는 벌을 받는다. ‘하느님이 벌을 내린 것이다.’(p.151) 그런데 과연 누구에게?

⑪ W에서는 누구나 집단으로 양육되고 자기가 나중에 살게 될 세상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⑫ 마지막의 ⅩⅩⅩⅦ는 W와 유년이 접점(이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을 이루지만, 거기에 해결이란 것은 없다.

⑬ 페렉이 창조한 W는, 그러므로 현대 회화의 과제 ㅡ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ㅡ 를 마치 마그리트처럼 ‘닮음을 통해 닮음을 파괴하는’ 형식을 취해 붕괴시키고 있다.

⑭ 예컨대 ‘자서전을 창조’한다는 형태는 W를 파괴하고 딛고 일어서려는 것처럼 보인다.

⑮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살아야 하는 W,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사는 인물, 집요하게 나열되는 그곳의 규칙. 이로써 뭐가 더 필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