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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하자르 사전』 밀로라드 파비치 (열린책들, 2011)


흠,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곧이곧대로, 순서대로, 그렇게 읽어 내려갔다. 애초 한 번 읽어서는 텍스트의 혼란스러움에서 허우적댈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ㅡ 세상에는 슬쩍 한 번 눈길을 줬는데도 무궁무진한 흥미로움을 느끼게 하지만 두 번 다시 읽을 수 없는 책과, 쥐며느리가 곱송그린 몸을 펴듯 느릿하게 읽히지만 몇 번이고 다시 눈을 대고 싶은 책이 있는데 『하자르 사전』은 양쪽에 끼인 샌드위치의 꼴로 보인다. 각설하고, 하자르 민족을 이주시킨 것은 동쪽의 수컷 바람이라 해도 그들(의 역사)을 촘촘히 활자로 엮은 것은 어디 바람뿐이겠는가. 사실 ‘하자르의 얼굴’처럼 이쪽의 텍스트가 저쪽의 텍스트로 변모하는 양상을 곳곳에서 ㅡ 자의든 타의든 ㅡ 엿보게 된다. 아마도 내가 이 『하자르 사전』을 읽은 날 밤이 유난히 얇아서 화요일에 서 있는 사람과 수요일에 서 있는 사람이 서로 악수를 할 수 있을 정도(p.66)였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내가 아는 어느 노랫말에는 ‘당신의 하루는 당신이란 배우가 주연으로 연기하는 무대이고 오늘은 어떤 배우가 조연으로 들어올지도 모르며 또 지구, 우주, 어디까지가 그 무대의 끝인지도 모른다’는 구절이 나온다. 게다가 책의 옐로 북에는 아테 공주가 꿈 사냥꾼들의 수석 사제에게 바쳤다는 시 하나가 등장한다.



깊은 밤, 잠이 들면
우리는 모두 배우로 변합니다.
우리는 매번 다른 무대에 올라서서
자신의 배역을 공연합니다.
그렇다면 낮에는?
낮에 깨어 있을 때에는 그 배역을 연습합니다.
때때로 자신의 배역을 제대로 연습하지 못했을 때에는
감히 무대에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 대신 다른 배우들 뒤에 숨어 있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보다 대사도 더 잘 알고
동작도 더 훌륭한 배우들 뒤에.
그리고 당신은,
당신은 무대에서 연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연기하는 것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찾아옵니다.
부디 내가 연습을 잘 한 날에
당신의 두 눈이 나를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주일 내내 현명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람은 없으니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은 오로지 내가 당신에게 불어 넣고 당신에게서 가지고 오는 것에서 비롯될 뿐인가? 왜냐하면 진실을 열어 보면 언제나 우리가 그 안에 집어넣은 것만큼만 들어 있기 때문에?(p.244) 그렇다면 대체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2인3각 혹은 3인4각을 하며 다리를 절고, 목을 삐끗하고, 결리는 어깨를 부여잡고서 책을 읽을 따름인 것? 인간은 자신의 어제와 내일을 너무나 뒤늦게 발견하기 때문이고 현재는 그 사이에 끼어서 숨을 거두는 중이라서…… 라고밖엔 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대체 이 희한하고 괴상한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간파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 책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두브로브니크에 살던 유대인인 사무엘 코헨이라는 자가 어느 전기에 달아놓은 주석에서 말했듯, ‘해석하지 않은 꿈은 읽지 않은 편지와 같긴’ 하지만 ‘아직 읽지 않은 편지는 아직 꾸지 않은 꿈과 같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 『하자르 사전』에 잊힐만하면 출몰하는, 그래서 이름도 다 외울 수 없는 인물들은 원주상의 어떤 지점에서도 만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의 이야기는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의 기기묘묘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아직도 이 악마 같은 사전을 오롯이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의 성기에 입을 갖다 댈 수 있을 만큼 몸이 굽은 야곱 탐 다비드 벤 야히아(요하네스 다우브마누스)처럼 뇌 속의 회로가 굽어 있다 ㅡ 물론 그는 ‘Verbum caro factum est(말이 곧 육신이 된다)’라는 구절을 읽고 죽음을 당했지만 이쪽은 아직 살아있다……. 분명 『하자르 사전』은 ‘사전’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또한 결정적으로 백색왜성이 초신성을 조우하게 하는 마력의 구절을 감추어 놓고 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수요일의 카페에서 연인을 만나기 위해? 아브람 브란코비치가 세상을 떠난 해와 이스탄불의 킹스턴 호텔에서 도로시아 슐츠 박사가 연루된 살인 사건이 일어난 해는 293년이란 으스스한 간극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내가 무엇을 읽었는지 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