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책_롱

『소설』 제임스 미치너 (열린책들, 2006)


해(2011) 읽은 어느 기사에는 두 소설을 비교하여 전개시킨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런 식이었다. ‘폴 오스터가 쓴 『뉴욕 3부작』은 한 인물에게서 여러 인물이 겹치는 과정에서 자기를 찾는 구도가 보인다면, 제임스 미치너(『소설』)는 작가 자신을 네 명의 등장인물로 나눈 셈이다.’ 공공 도서관 사서가 어린 셜리 ㅡ 이본 마멜 ㅡ 에게 해준 말은 더욱 농밀하다. 「(…) 그게 바로 소설이란다. 서로의 꿈을 교환하는 것…….」 이 작품은 나에게 부적과도 같은 것인데 연유는 이러하다. 일본에 있을 때 카미야(神谷)라는 오십 줄의 양반과 경마장엘 간 적이 있다. 그가 내게 말했다. 「태어나서 처음 산 빗나간 마권을 지갑에 가지고 있으면 교통사고를 막아주는 부적이 되는 거야.」 그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까지 ‘2008년 11월 29일’ 날짜가 찍힌 그 마권을 지니고 있다 ㅡ 그리고 마권의 존재 이전과 이후 교통사고를 당한 적은 없다. 미치너의 『소설』도 우연찮게 2008년에 구입하게 되었는데(2006년에 인쇄된 것이지만) 이후 번지르르한 고층건물의 회전문에 끼이거나 의자 모서리에 팔꿈치를 찧어 전기충격을 당하는 일로부터 막아줌과 동시에, 이 책은 그것이 주는 인간의 입장과 가치관, 세계관, 이야기(說)의 공정과정과 탄생의 충분조건으로 인해 나를 ‘왜 쓰는가’에 대한 맹렬한 공격에서 지켜주는 부적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나는 이 작품에게서 상당한 모험심을 요구받았다. 제1의 과제는 책의 활자가 펜싱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다듬어져야 하는 일련의 은밀한 주조과정을 엿볼 준비가 되었는가 하는 것이었고, 제2의 과제는 ‘왜 읽는가’와 ‘무엇을(어떻게) 읽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ㅡ ‘왜 쓰는가’에 대한 것은 노코멘트. 그러므로 당최 이 책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윌리 넬슨이 ‘만약 여자가 섹스라는 덫으로 남자를 잡으려고 한다면 그녀는 매번 성공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작용력은 영원히 멈춰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듯 소설이라는 예술이 인간의 본능을 잡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소설의 영원성을 본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발견한 것은 출근길 전철 안 덤덤한 사람들의 빳빳하게 발라진 무스와도 같은, 이등변삼각형을 지탱하는 밑변 같은 것이었다 ㅡ 그렇기에 작가에겐 발명가라기보다 ‘발견자’란 말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스트라이버트의 『텅 빈 물탱크』처럼 자신만만하게 뒷짐을 지지만 내밀한 조바심이 이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에서 레드(모건 프리먼)은 지질학을 시간과 압력의 연구라 했다. 내가 보기에 소설도 다르지 않다. 단 똘레랑스라는 필수요소가 추가되어야 하겠지만……. 『소설』이 잘 쓰인 작품이라는 것은 페이지가 중첩될수록 분명해지는데, 특히 티모시의 죽음 이후 만들어지는 유작에서 모두가 하나의 편집자가 된다는 점과, 독자인 제인 갈런드의 독서에 대한 세계관(내지는 가치관)의 변화 ㅡ 정말이지 놀랄만한 포착 ㅡ 이다!


이 책은 네 가지 포지션을 균형 있게 둠으로써 ‘관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으며 매끄러운 은(직)유를 통해 무척이나 쉽게 소설에 다가갈 수 있게 했다.


덧) 오자가 몇 군데 보이긴 했는데 그것들은 그렇다 치고, 앞날개와 뒷면의 연보에는 1903년에 태어나 1997년에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잘못)나와 있다 ㅡ 그는 1903년보다 적어도 4년은 늦게 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