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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어느 섬의 가능성』 미셸 우엘벡 (열린책들, 2007)


시는 읽고 싶지 않다. 그의 작품은 『투쟁 영역의 확장』에 이어 두 번째인데 ㅡ 단순히 제목이 마음에 안 들어서 『소립자』는 아직 읽지 않았다 ㅡ 그가 자신을 두고 절망의 전도사로 취급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나 또한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하고, 이 책도 두 번 다시는 읽고 싶지 않다. 이야기 속의 다니엘이 『신적인 환경』을 우연히 주워 읽고 절규를 토하고서 자전거 공기 주입 펌프를 던져 부숴 버린 것처럼 나도 이 빌어먹을 똥통 같은 텍스트의 지침을 들어가며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에도(그래서) 어떤 하나의 가능성, 다니엘과 다니엘25의 가능성, 신경질적이고 쾌활한 개(폭스)의 가능성, ‘기존인류’의 증언이 일치할 가능성, (고작)그런 것들 때문에 아주 뻔뻔스럽고 밑도 끝도 없는 이 책을 모조리 읽어냈다. 기본적으로 『어느 섬의 가능성』은 몇 개의 시퀀스로 무척이나 불편한 에너지들을 만들고 배설한다. 물론 헛되이 생각을 주물러 대거나 폭력으로 기쁨을 주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소설 속 예언자가 삶은 근본적으로 보존 옵셥이라고 한 걸 보면 나로서는 앞서 말한 이 작품의 특징이 이야기의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이를테면 영화 《나쁜 남자》를 보라. 거기엔 인간의 얼굴을 한 고깃덩어리들이 등장한다. 거기서는 검은 옷을 입은 놈이 흰 옷을 입은 년에게 강제로 키스를 하려 한다. 여기에는 계급의 논리, 밝음과 어둠의 논리, 착취와 피착취의 논리가 있다. 조금 곱상하게 말하자면 ‘나란히 서기’의 발로다. 타자와 다름이 없는 나란히 서기. 하나 생각해둘 것은 이것을 이 소설과 ‘나란히 놓고는’ 볼 수 없다는 거다. 왜 굳이 접점이 없는 소설과 영화를 함께 언급하는가 하면, 영화의 한기란 인물은 사랑하기 때문에 여자와 섹스하지 않는데 소설의 다니엘은 사랑하지 않고도 섹스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섬의 가능성』을 앞의 영화의 ‘+알파’의 개념으로 보는 것도 그 이유다. 이 책의 앞날개에는 ‘삶의 고통에 눈감고 살아가려 하는 주인공이 치명적인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을 통해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의 고통을 경험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적혀 있는데, 이 세계의 폐단이 바로 그것이며 현대인의 고통의 근원 또한 그것이다. 그럼으로써 나는 책에서 ㅡ 앞서 영화 이야기를 했으니 어떻게든 끼워 맞추려 하면 ㅡ ‘인간은 결코 행복을 누리도록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단 하나 가능한 그의 운명은 주변에 불행을 퍼뜨려 다른 이들의 삶을 자신의 삶만큼이나 견디기 힘든 것으로 만드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p.68)는 말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