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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짐승의 길(전2권)』 마쓰모토 세이초 (북스피어, 2012)


군가는 그렇고 그런 치정을 다룬 B급소설이라고 할는지도.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일단 재미있으니까. 나는 트릭을 풀고 범인을 밝혀내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세련됐다, 뭐 그런 생각이다. ‘이야기’가 있잖나. 단 한번이라도 이름이 언급된 인물은 책동의 기미를 보이고, 나라도 그럴 수 있으려나, 하는 ‘텍스트 vs(and) 현실’의 일말의 끈이 있으니까 말이다. 집에 병자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다미코의 생각은 나도 (경험해봐서)안다. 그래서 얼마든지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충분조건이 구비되어 있다. 단, 저 뒤에서 ‘노인의 고독’(하권 p.300)을 깨달았다면 남편의 고독 또한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 또한 생긴다 ㅡ 어느 쪽이건 그녀가 씁쓸해지기만 하지만 역시 세이초의 여성 심리묘사는 탁월하다 못해 정말이지 천재적이다. 이미 범인이 밝혀진 상태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물론 형사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문제는 숨 돌릴 수 없는 ‘마트료시카 내러티브’다. 다미코가 기토의 집에서 본 분노의 불상(佛像) 애염명왕(愛染明王)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이미 그거면 됐다. 아니, 호센가쿠 여관의 ‘미유키에서의 도박’ 때부터,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모든 걸 말했다싶을 정도다. 꿈을 모방한 가레산스이(枯山水)처럼. 산 제물로 바쳐진 사람, 그리고 그 제물을 삼켰지만 후에 내뱉어진 건 푹 패어진 구멍의 사물일 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결구도에 서서 부침을 계속하는 건 역시 다미코인데, 여관의 고참 오쿠니와 불똥이 튀는가 싶더니만 뒤에서는 저택의 고참 요네코와 신경전을 벌인다(정작 주의해야 할 건 그게 아니었으니!). 어쩌면 여관 여주인의 ‘야간비행’(향수 이름)과 저택에 들어간 후 다미코의 몸에서 난 ‘야간비행’은 기토의 여자들을 보여준다는 측면도 있지만 같은 꿈을 꿨더라도 해몽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암시하는 걸까 ㅡ 그녀는 결국 날지 못했으니. 여관을 벗어난 무대는 쓸쓸한 뒷골목 같은 뉴 로얄 호텔 8층이란 무풍지대. 그러나 역시 이곳은 한 번 걸려들면 빠져나올 수 없는 올무였다. 길을 헤매고, 자칫하면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거대한 산. 형사 히사쓰네가 줄곧 느껴왔던 게 이것과 같은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히사쓰네에게 닥치는 첩첩의 벽을 바라보면 나조차도 참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짐승의 길』이 독자에게 제공하는 정보는 크게 다미코와 히사쓰네라는 두 개의 생각의 줄기에서 뻗는다 ㅡ 그러나 다른 등장인물들 간의 밸런스가 무척 조화롭게 이루어져 있어 텍스트의 거의 무차별적인 린치를 맞을 수도. 동체에 접근하(려)면 할수록 기토가 ‘후와, 후와’ 하고 쪼그라든 잇몸으로 웃는 모습이 따라오는 것만 같다. ‘경찰이라는 조직은 작은 죄를 눈감아 주고, 언젠가 큰 범죄의 혐의를 받게 되었을 때 그것을 체포 구실로 쓰려고 아껴 두는 곳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는 히사쓰네의 고뇌가 다미코에게도 해당된다 하면 억지이려나. 그러는 사이 초반에 사라진 다미코의 남편은 어느 샌가 잊히고 말았다 ㅡ 아차, 이름도 잊어버렸네, 미안(재킷에 ‘어깨뽕’ 넣던 시절 일본 드라마 주인공과 한자만 다른 이름이었지! ‘죽은 놈만 불쌍하다’ 인가!). 어쨌거나 저쨌거나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열차를 타고 달린 한 여인의 비극적인 말로’라는 촌스런 부제라도 붙여주고 싶을 만큼 『짐승의 길』은 그 ‘길’을 철저히, 처절하게 걷는다. 일견 김기덕식 진지함도 엿보이고. 《악어》(1996)에서의 용패와 현정을 고타키와 다미코로 나란히 놓으면 어떨는지. 물론 순서는 다르다. ‘병주고 약주고’와 ‘약주고 병주고’. 게다가 용패는 막판 한강에서 치졸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통에 멋진 판타지는 깨져버리지 않는가. 근데 왠지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 대문》, 《섬》, 《나쁜 남자》 등등, 김기덕과 비슷한 구석을 발견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패트런이건 모르모트이건 매한가지니까……. 아, 한 가지 잊은 것. 후반부에서 건재상과의 연결 부분은 좀 갑작스럽다고 느꼈지만 뒤에서 그것이 다시 한 번 등장하고, 또 그게 ‘어떤 역할’을 한다는 것에 조금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기토의 이불 밑에 있던 권총은 끝내 발사되지 않았다 ㅡ 아오마메(무라카미 하루키, 『1Q84』)의 총 역시 그랬고 ㅡ 체호프가 실망하겠는 걸. 발사되지 않은 권총이 안타깝더라도, ‘불(火)로 시작해서 불로 끝’났으니 이 정도면 수미쌍관의 미덕은 지킨 셈.


) 하아. 해설까지 끌어오며 얘기를 더 하고 싶지만 여백이 너무 좁아 여기에 적지는 않겠다. 그래도 거기서 하루키(村上春樹)를 언급한 부분은 재미있었다(그는 『해변의 카프카』 때부터 정나미가 좀 떨어지긴 했지만). ……그런데 쓰고 보니 두서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했다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