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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조용한 혼돈』 산드로 베로네시 (열린책들, 2011)


분히 소설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 위험도 많고. 그런데 생각해보자. 누구도 너무나 이상하고 너무나 그럴듯하지 않은 생각을 할 수는 없으며 그런 생각은 이런저런 철학자들이 이미 다 했다고 한 데카르트의 말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그러니까 그건 차치하고라도 『조용한 혼돈』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첫 페이지부터 종반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이 책에서 뭐랄까 가슴 먹먹함이랄지 덤덤한 고통 내지는 폭풍 같은 좌절 따위는 느껴지지 않을 거라 여겼다. 애초 그런 죄책감을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일이 틀어졌다. 500쪽에 가까운 텍스트는 마지막 단 한 문장을 위해 꿈적이고 있던 거였다……. 하나의 생명이 죽으면 하나의 세계가 사라질까? 내가 죽는다는 건 단지 뱀이 허물을 벗듯 아주 짤막한 잔상만을 남기고서, 혹은 그것조차도 우연히 그곳을 지나치던 땅꾼이 발로 차버리기라도 한다면, 이 세계에서 나만 조용히 빠져나온 뒤 나머지는 무척이나 차분히, 그대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폭풍우라고? 안개라고? 무슨 말들을 하는 거야? 우리는 단지 우리의 계기들을 다루었을 뿐이라고!」 칠레출신 철학자 마투라나가 비유로 삼은 이야기다. 비행기 외부에서 일어난 것은 비행기 안의 것들과는 관계가 없으며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라고. 우리(적어도 나)는 우리(나)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선 다른 세계까지 마음대로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일생을 이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조종사들처럼 자신의 계기판과 모니터로만 세계와 관계할 수 있을 뿐이지. 그럼 반대로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면 또 하나의 세계가 탄생할까? 나는 이 새롭게 탄생한 세계는 타자의, 남겨진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본다. 물론 『조용한 혼돈』에서는 마흔셋의 홀아비인 피에트로 팔라디니가 이 새롭게 탄생한 세계를 받아들이는 주된 역할을 한다. 클라우디아와 ‘미안하지만’ 놀이를 하고 학교 앞 정원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것. 베네데타의 엄마(바르바라 혹은 베아트리체)와 어색하게 인사하는 것. 처제 마르타에게 ‘형부는 정말 나쁜 놈이야’ 소리를 듣는 것. 동생 카를로와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 자신이 파도 속에서 구한 부자 여인과 섹스를 하는 것. 에녹의 글을 읽으며 맞춤법을 지적하는 것. 피퀘트의 넌덜머리나는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쳐주는 것. 자신을 선생이라 부르는 노인과 페페론치노를 뿌린 스파게티를 먹으며 토마토소스를 붉은 피라 생각하는 것. 개를 데리고 다니는 욜란다의 매력 없는 얼굴을 보는 것 등등. 당연히 이런 모든 것에 전제되는 건, 제일 처음에 제시되는, 해변에서 여자를 구하며 발기하는 것이 되겠지만. 그럼 그 빌어먹을 물건이 문제였군. 새로운 세계의 ‘혼돈’ 속에서 ‘조용히’ 발기되고 그런 자신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 고통스럽지 않게.


덧) 버트런드 러셀 曰,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덧) 대체 라라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피에트로의 아버지는 그녀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알고 있긴 한데). 내가 책을 잘못 읽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