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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흑백』 미야베 미유키 (북스피어, 2012)


를테면 텍스트와 서브텍스트의 맞물림. 그거다. 미스터리나 이런 괴담이 갖는 강력한 헤게모니는 현실에서 느끼는 두려운 마음을 일종의 (설명하기 힘든) 형태로 만들어준다는 것에 있다고 여기고 싶다. 뭔가를 맞닥뜨리고 인식하고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단숨에 퓽, 하고 쏟아내는 거다. 어떤 생각들을 전부 마음에 넣어 뚜껑을 닫아버리면 그만이지, 하고 쉬이 치부할 수 없다.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짐을 내려놓는다는 뜻도 될 수 있으며, 타자에게 마음을 내비침으로써 그 두려움이 내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마지막 이야기 「이에나리(家鳴り)」에서 저택을 지키는 관리인 ㅡ 왠지 웃을 수만은 없는 ‘끝판 왕’ 같은 느낌인 걸 ㅡ 이 저세상과 이 세상을 잇는 길목에서 손님을 맞이한다는 것을 이 『흑백』의 무대인 미시마야(三島屋)라는 주머니 가게에 빗대어 말한 것은 어찌된 일일까. 아마도 사람들의 마음을 그러모을 수 있는 주머니에 주인공 오치카(おちか)를 대입하려는 뜻이겠지. 그녀의 오빠 기이치(喜一)가 「불행한 일을 겪은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조금은 구원받았다는 거냐?」라고 묻는 대목은 숙부 이헤에(伊兵衛)가 ‘흑백의 방’을 그녀의 물리치료실로 사용한다는 뜻도 되리라. 사실 이런 전개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하고 잠깐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사소하고 계산적인 게 아니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내가 뭘 무서워하는지 알아 가고 있는 거야.」 살아 있었을 때 저지른 어리석은 잘못에 대한 후회를 듣는다 ㅡ 이거 원 장화홍련이 따로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은 『흑백』은 모노노케(物の怪) 이상의 것을 선사한다.


이탈리아의 소도시 팔치아노 델 마시코(Falciano del Massico)에선 죽음이 불법이라고 한다. 죽는 걸 금지한 조례. 그간 묘지를 할애해 주던 옆 도시에서 더 이상 그렇게 못 한다고 선언하자 시장이 주민들에게 죽지 말라고 법으로 정해버린 것인데, 그가 새 묘지를 세울 때까지 시민들에게 죽지 말라고 명령했단다. 세 번째 이야기 「사련(邪恋)」과 네 번째 이야기 「마경(魔鏡)」에 등장하는 마쓰타로(松太郎), 오사이(お彩), 이치타로(市太郎) 등은 이래서야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어쨌든 귀신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산 사람이다. 이건 틀림없다. 나와는 ‘다른’ 마음들을 듣는 것. 아니 들어주는 것. 귀신의 처지라면 산 사람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가장 슬픈 일이 아닐는지. 그저 잠시만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마음 한켠만 내어주었으면 하는 거다. 노에시스(noesis)와 노에마(noema). 이것들은 어쩐지 친숙하지 않은 상황과 마주할 때만 그 효력이 있는 것 같다. 양명학의 창시자 왕수인(王守仁)은 「마음 바깥에 사물은 없다[心外無物]」고 설파했다. 어느 날 제자가 꽃을 가리키며, 세상에는 마음 바깥에 사물이 없는데 이 꽃은 깊은 산에서 저절로 피어나 저절로 지니 그것이 내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자 선생이 말했다. 「그대가 이 꽃을 보기 전에 이 꽃은 그대의 마음과 함께 고요한 상태에 있었지만, 그대가 와서 이 꽃을 보는 순간 이 꽃의 모습은 일시에 분명해진 것이네. 이로부터 이 꽃이 그대의 마음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네.」 음, 그러니까, 만약 꽃을 보지 않았다면 꽃에 대한 사변도 불가능하지 않겠냐는 말일 것이다.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거창하고 대단한 일인가(이렇게 적고 보니 작가의 다른 작품 『화차』가 생각난다. 단지 말하고 듣는 행위가 질펀한 어둠으로 끝났으니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기쁨의 윤리학’은 씁쓸하게만 느껴진다. ‘듣는다’와 ‘말한다’, 이것으로 나는 『흑백』은 이미 정의되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