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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화차』 미야베 미유키 (문학동네, 2012)


난 해였던가. 일본에서 제작된 드라마 버전을 봤는데 조금 실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기억으로는 다소 낡아보였고 서사구조도 핀트가 좀 안 맞는달까. 그래서 역시 책으로 읽어야겠다고 결심, 최근 출간된 개정판을 보았다. 읽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린 것 같으니 일단 몰입도는 상당히 좋다. 나에게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은 기대한 만큼을 웃도는 것들도 많고 ㅡ 사실 (거의) 다가 그렇다. 소비자는 돈을 가지고 있고 자본가는 상품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돈을 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가는 우리에게 허용된 순간적인 자유나 우월함을 오래 참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소비자의 돈을 다시 회수하지 못할 경우, 잉여가치를 얻을 수 없고 나아가 그 돈으로 생산에 재투자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다양한 유혹의 기술을 개발하는 데 혈안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의 우월성을 보장해 주는 돈을 강제로 뺏을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소비하도록 유혹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밖에 달리 길이 없다(강신주, 『철학 VS 철학』, 그린비, 2010). 그럼 여기서 다시 코제브의 말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스스로 욕망하고 있고, '대가리가 커질수록' 자신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란 것을 망각한다. 아무리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고 동물로 전락할 수도 있다지만 ㅡ 본능을 이겨낼 수 있는 이성이 존재한다지만 ㅡ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반드시 결핍이 존재할 때만 집착이란 것이 생겨날까?  내가 보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 같다. 명백히 본말전도다. 이래서는 말이 되질 않는다.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전체의 시스템이 문제라지만 개인의 오류도 분명히 있다. 개인은 영민하다지만 집단은 우매한가? 이 말은 반드시, 모든 경우에 성립할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