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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이진경의 필로시네마』 이진경 (그린비, 2008, 개정판)


아, 좀 쉽게 풀어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근본적으로 영화 얘기를 하고 있긴 한데 거기에서 뽑아낸 철학적 구조가 중심이 되니, 뭐 철학 용어가 나와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필로시네마』는, 살짝 늘어붙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10편의 영화'라는 부제처럼 온갖 스펙트럼의 탈주를 갖고서 진행되는 영화 이야기다. 인간은 뭐든 사유하기 마련인데 여기선 빠르게 동작하는 이미지에서 어떤 사유를 뽑아낼 수 있을까, 하는 게 문제가 된다. 그것도 '탈주'를 ㅡ 삶으로든 삶에서든, 어느 쪽이든 간에. 그러니까, 이건 철학서다……. 근데 그 '탈주'라는 게 사실은 에셔(Maurits C. Escher)의 판화처럼 돌고 도는 것이라면? 그래서 어떻게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면? 탈주가 당차고 아름답게 보인다면 그건 우리가 쉬이 볼 수 있는 가시적 세계에 있는 것은 아닐 거다. 그런 의미에서 (책에 등장하는)영화들은 모방의 예술이 아니라 창조의 예술 ㅡ 점, 선, 면, 체가 빚어내는 가상의 이미지 ㅡ 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그런 정신사나움에 지나지 않겠지.





가상 같은 현실, 현실 같은 가상,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하이퍼리얼리즘이 난무하는 곳에서 어찌 '탈주'하지 않고 배기겠나? 그런데 약간 우스운 측면, '막힘'이 없다면 탈주 또한 의미가 없고 전혀 아름답지도 않을 거다. 우리의 앎에 영향을 주는 현실, 가상, 타자의 임팩트는 몹시도 강력한데 거짓을 거짓이라고, 거짓을 현실이라고, 현실을 거짓이라고…… 이렇게 끊임없이 되묻고 사유하는데, 내가 과연 현실(혹은 가상)을 놓칠 수 있을까? ㅡ 「이러니 내가 널 못 잡아넣겠냐?」(영화 《공공의 적 1-1 강철중》에서 철중의 대사) 우리는 어떻게든 현실(가상)을 잡아 처넣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보는(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해 칸트와 니체의 의견은 나뉘어지지만 둘 다 사유만은 고개를 주억거릴만하다. 「안경으로 바라본 세계와 맨눈으로 바라본 세계 중 과연 어느 것이 진짜일까?」(강신주, 『철학 VS 철학』, 그린비, 2010) 책에서 소개된 영화 《토탈리콜》(1990)만 봐도 시종일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묻지 않았나. 그런데 바꿔 보면 이게 참 매력적이다. 이렇게 황당하고 슬픈 질문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