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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불야성』 하세 세이슈 (북홀릭, 2011)


세 세이슈(馳星周) ㅡ 홍콩 배우 주성치의 이름을 뒤집어놓고 일본어로 발음한 필명 ㅡ 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불야성』 단 한 권으로(물론 시리즈가 있긴 하지만) 사람 진을 다 빼놓으려고 작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알고 있는 하드보일드 쪽이라면 대실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 정도밖에 없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극의 전개와 묘사며 인물의 조형이며 독자까지 배신하는 철저함이며, 뭐 하나 뛰어나지 않은 게 없다. 정말 오랜만이다, 한 자리에서 내리 읽게 만드는 작품은. 하드보일드의 태생적 특질, 여기서는 선택, 선택만이 살 길이다.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인공이 붙잡아야 하는 끈은 바로 거기다. 당연히도 나는 슈미트(Carl Schmitt)를 떠올리게 된다. 「적이란 바로 타인, 이질자이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적으로 어떤 타인이며 이질자라는 것만으로 족한 것이다.」 그가 하는 말을 조금 과장하자면 '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내 존재는 성립할 수 없다'라는 결론이다(그의 '국가의 독재'라는 건 차치하고). 물론 근저에는 정치적 카테고리에서의 편가르기라는 식의 비관적 논제가 깔려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나는 이 논리에 지적 같은 건 할 수 없다. 당장 집 밖에만 나가면 모든 게 정치적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불야성』에는 '좋은 놈'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윗대가리로부터의 시혜로 존속하거나 그 윗대가리가 되거나. 아니면 철저한 아웃사이더가 되거나. 하지만 그 아웃사이더 역시 뭔가가 필요하다. 먹잇감이다. 결초보은의 관계든 채권채무 관계든 상관없다. 최대한 타인에게 빚을 만들고, '보험'을 들어두고, 머리를 굴린다. '구성된 주체'와 '구성하는 주체' 정도의 차이쯤 될까. 신주쿠는 그들을 지켜주는 가이아처럼 여겨지니 말이다. 그럼으로써 소설은 인간이란 개념의 내포와 외연을 무색케 만든다. 자연스레 리좀 같은 복잡다단한 뿌리줄기를 옮겨 다니긴 하지만 그 끝엔 벽이 있어서 ㅡ 에포케(epoche), 즉 자의든 타의든 '판단 중지'가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아무리 자유스런 코뮤니즘을 외쳐도 신주쿠는 그것과 일국사회주의 양자의 모습을 띠며 산소를 빨아들이고 이산화탄소를 내뱉는다. 이쯤 되면 교훈 아닌 교훈은 뭘까? 친구는 가까이, 적을 더 가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