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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2012)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 8점
인디고 연구소 기획/궁리


설고도 교묘하지만 지젝의 논의는 절실하게 동작한다. '불가능의 재구성' 내지는 '가능의 재구성'을 담고서.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을 영화로 만든 알란 파커 감독의 《더 월(Pink Floyd The Wall)》(1982)을 보라. 영화에는 코드화된 삶, 벽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강제와 억압, 전쟁의 고통, 컨베이어 벨트 위의 학생들……이 등장한다 ㅡ 거기서 우리가 하는 건 '망치의 행진'이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벽은 허물어진다. 실제로 무너졌는지 아니면 그런 의지를 보여 주려는 건지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해석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우스운 건 벽을 부수려는 의지나 논의 또한 '벽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밖으로 나가려는 파리가 창문이 닫힌 것도 모른 채 자꾸만 투명한 유리에 몸을 던지듯이. 진부한 말이지만, 벽이 존재함으로써 새로운 사고와 행동이 가능하고 가치를 갖는 게 아닐는지 모르겠다. 역설적으로 얼음을 깨뜨리기 위해선 먼저 물이 얼어야 하지 않겠나.





공동선은 저에게 있어 투쟁의 문제입니다. 공동선은 저에게 '자유를 향한 공동 투쟁'을 의미합니다 (...) 우리 스스로가 이방인이 되어봄으로써 어떻게 공동선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주제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 예를 들어, 오늘날 프랑스의 어느 보수주의자도 「나도 68혁명 현장에 있었어. 나 또한 물론 시위를 했지. 하지만 후에 나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재사유(rethink)하는 것 말입니다.


ㅡ 본문 p.195-209




그래서 「사회 · 정치적 공간 안으로의 배제된 자들의 침입이 곧 민주주의」라는 지젝의 말은 힘을 얻는다. 이것은 아렌트(Hannah Arendt)의 「인간의 무사유로 인해 전체주의가 발생한다」와 궤를 같이 한다. 그녀가 말한 '철저한 무사유'는 바로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하므로. ……사회는 허용되거나 금지되는 것들이 명시적으로 드러날 필요가 없어야 한다. 그런 (윤리적)표준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논의들이 필요한 거겠지. '공동선'이 무시되고 '최고선'이라는 것이 존재할 땐 누구나 그것을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알게 된다. 최고선을 좇는 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그런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최고선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들은 이미 그들이 배제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