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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나치와 이발사』 에트가 힐젠라트 (열린책들, 2012)


나치와 이발사 - 10점
에트가 힐젠라트 지음, 배수아 옮김/열린책들


자꾸 채플린이 생각나는 거지…… 그래, 그랬다. 그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가 먼저 있었다. 영화에서 채플린은 히틀러를 풍자한 힌켈이란 인물과 유대인 이발사로 번갈아 등장했었다(여기에는 슐츠라는 인물도 나온다! 심지어 한나까지!). 힌켈과 닮은 이발사가, 여기 『나치와 이발사』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등장한다. 우선 독일인 막스 슐츠가 있고 유대인 이치히 핀켈슈타인이 있다. 이 '슐츠-핀켈슈타인' 공식은 시종일관 샴쌍둥이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둘은 어릴 적 친구였지만 슐츠는 하켄크로이츠 완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친구 핀켈슈타인과 그의 부모를 사살한다. 히틀러유겐트에서 크리스탈나흐트, 홀로코스트까지 이어지는 고리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이 대량 학살범인 슐츠는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자신의 분신(으로서) 핀켈슈타인으로 변모한다. 그러니까 막스 슐츠는 신분을 위장하여 이치히 핀켈슈타인이 되어버린 거다. 그것도 머리와 가슴속까지 진심으로 변한 채! 수용소에서 페놀 주사로 처형을 하던 슐츠는 어느새 아이들에게 비타민 주사를 놓게 되고, 핀켈슈타인을 사살할 때 눈을 보지 않으려 뒤에서 총을 쐈던 그는 이제 택시 앞좌석에 앉아 납치범을 등 뒤로 상대하고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왠지 미국식 사르카즘이 곳곳에서 엿보이는 이 작품은 스물여덟을 못 채우고 요절한 로커들 같아서 일견 하드코어의 냄새를 풍긴다. 그도 그럴 것이 막스 슐츠는 빈번하게 변신을 해대며 계속해서 절정을 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약간 머리가 이상한 아이에서 지식이 풍부한 소년으로, 이발사로, SS 대원으로, 대량 학살자로, 유대인 중소 암거래상으로, 그리고 또 당황스럽게도 해방 투사가 되었다. 제 손으로 죽였고 친구였던 이치히 핀켈슈타인의 신분으로 위장해서 말이다. 대체 변곡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를 생각하기만 하면 나는 달려가서 그대로 부딪치고 싶은 욕구, 산산이 부숴버리고 싶은 욕구, 완전히 집어삼켜서 내 살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폭발적 욕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귀중한 정액이 분출된다……. 그리고 정액을 소진하고 나면, 삼킨 것을 다시 뱉어 내고 싶고, 다시 끼워 맞추고 싶고, 쓰다듬고, 화해하고 싶어진다…….


ㅡ 본문 p.460




『나치와 이발사』는 가해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거짓 할례로 유대인이 된 슐츠,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밀입국하려는 배 안에서 한나란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나중에 그녀는 정신이 나간 채 날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정신병원에 구금당한다. 그런데 1984년에 만들어진 《버디》란 영화를 볼작시면 거기에서도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다. 병원에서 탈출하려고 옥상으로 올라간 버디가 아름다운 몸짓으로 뛰어내리는 장면. 그래, 그 장면이다. 새처럼, 두 팔을 쫙 펴고서 말이다(버디의 실어증은 이 소설에서 슐츠의 아내로 등장하는 미라로부터 발현된다. 굳이 연결하려면 뭐 그렇다는 거지). 어찌됐든 간에 이런 소설은 가해자가 어떤 대가를 받음으로써 피해자를 위로하는 형태가 되어야만 할 것 같기도 하다. 복수는 나의 것? 하지만 그렇다고 힐젠라트가 꼭 그렇게 써야만 할까? 아니지, 그건 동어반복이다. 의미가 없는 거다. 소설 속에서 슐츠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것이 외려 병원에서 날고 싶어 하는 한나의 모습을 상징할 수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ㅡ 사실 좀 억지스러운 감은 있지만. 게다가 지방 법원 판사 볼프강 리히터와 카드 게임을 하다 격정에 사로잡혀 「이제 아시겠죠, 판사님, 내가 바로 막스 슐츠입니다!」라고 울부짖는 슐츠의 모습은 포의 「고자질하는 심장」과 묘하게 오버랩되지 않던가. 미친 것 같은 슐츠와 그렇지 않은 독자의 틈새(포의 작품도 마찬가지), 그 공백이야말로 치가 떨리는 폴란드의 숲을 어느 쪽에서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모호하게 만든다. 우리에게 평화만 있었다면! 그래, 오직 단 하나 평화만 있었다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단 하나 그것이 없었다!(p.512) 그래, 그렇게 된 거야. 말하자면 그런 거지.



덧) 원래의 소설은 결말에 주인공 막스 슐츠가 죽고 나서 신과 대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독일어판에서는 이 내용이 삭제되었다. 전쟁의 상처가 아직 깊은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음을 고려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독일어판 수정 부분은 후에 출판사(열린책들) 카페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