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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최장집 (폴리테이아, 2012)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 - 8점
최장집 지음/후마니타스


「우리가 하는 정치가 민주주의라면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이후 반복되어 온 한국 정치의 한 속성은, 정치가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사회경제적 이슈 영역을 적극적으로 대면해 그 영역에서의 갈등을 해소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공치사와 같은 정치제도 개혁이나 정서적 이슈에 골몰하면서 현실 생활에 기초를 둔 과제를 방치하는 특징을 보인다. 왜? 시민 생활의 실질적 향상에 기여하게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일이 (민주) 정부의 책임임에도, 우리는 그런 일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정치적 담론은 '(빌어먹을) 통합'만을 강조했다. 「신들이 없애려고 하는 자, 그자를 신들은 우선 미치게 만든다.」 보라. 저들은 우리를 없애버리기 위해 에피타이저 격으로 우리를 먼저 미치게 하고 있지 않은가. 1+1=2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온갖 희한한 일을 벌이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어떤 면에서) 멋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돌리면, 거의 모든 사회가 자신들을 '민주적'이라 부른다. 그러면서 모두가 행복하고 모든 갈등이 해소되는 디즈니랜드를 광고한다. 문제는 디즈니랜드를 만든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기꺼이 이용하는 자들이다.



과거 문재인은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보개혁 진영 역량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정권을 담당한 어떤 그룹만의 힘으로 개혁을 할 수는 없다. 정권과 시민사회 사이에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서로 당기고 밀어주고 요구하고 받아들이고.」 역시 같은 일간지에서 안철수는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백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추상적으로 말하면 정의다.」라고 했고, 두 번째 백신에 대한 물음에는 「계속 그, 그, 그거. 두 번째, 세 번째도 정의!」라고 했다(어쩌다보니 최근 뉴스만 틀었다하면 나오는 사람들만 언급했는데, 또 어쩌다보니 박근혜의 코멘트는 찾을 생각을 못했다). 여기서 더욱 의미심장한 진중권의 말을 가져와보겠다. 「국민의 주권을 가진 자는 누구인가? 시민인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이 비상사태라고 판단하는 권리를 가진 자가 곧 '주권자'다 (...) 주권재민? 세상에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니, 웃기는 얘기다.」 이 섬뜩하리만치 서늘한 역설은 어떤 장엄함까지도 느끼게 만든다.



민주주의는 간단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일련의 제도적 · 절차적 요건들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즉 그것은 평등한 시민권, 1인 1표의 투표권에 의한 정치 참여의 권리,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의 주기적 실시와 이를 통한 정부의 선출, 정당과 자율적 결사체의 자유로운 조직과 이들 간의 상호 경쟁과 협력 등이다.(p.139) 이 얼마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논리인가. 하지만 이론이 좋다고 현실에서도 똑같이 아름다운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 한국 노동 운동의 위상 또한 마찬가지다. 권위주의와 싸우는 건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를 갈망하기 때문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