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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_롱

『정치적인 것의 개념』 카를 슈미트 (살림, 2012)


정치적인 것의 개념 - 8점
카를 슈미트 지음, 김효전 외 옮김/살림


식인이라면 적을 사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친구를 미워할 수도 있어야 한다? 친구는 가까이, 적을 더 가까이? 먼저 적과 동지의 구별이 선행되어야 할 텐데 선악이나 미추로는 환원되지 않을(못할) 게 뻔하고 최소한의 은유나 상징으로 해석되는 것 역시 지양되어야 한다. 더욱이 사적으로 증오하는 대상도 아니어야하므로, 적이란 단지 적어도 때에 따라서는, 즉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투쟁하는 인간의 전체이며, 바로 그러한 전체와 대립하는 전체이다 ㅡ 「원수(사적, 私敵)를 사랑하라」 이지 「공적(公敵)을 사랑하라」는 아니니까.(p.43) 슈미트에 의하면 정치는 가장 기묘한 거래와 정략이다. '정치적'이라는 단어 자체의 사용까지도 순수하게 혹은 불순하게 작용한다. (공)적을 '정치적'이라고 부르거나 '비정치적'이라고 하여 격하시키는 경우가 그렇다. 정치적 실존은 무혈투쟁이 아니다. 오늘날 전쟁이 예전만큼 일상적이지 않다고 해도 전체적인 압박의 증가로 인해 '위급한 사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정치(적인 것) 역시 매한가지다. 권위주의적인 것과 무정부주의적인 것은 외따로 존재할 수 없다. 한쪽은 다른 한쪽에서 도출되고 양자는 서로를 뒷받침한다(슈미트는 이러한 '고전적인 정식화'를 토머스 페인에게서 찾는다). 정치(적인 것)의 영역은 현실적 가능성에 의해서 규정되기 마련이니까. 자유주의 또한 비자유주의적인 요소나 이념과 결부되어 있질 않나. 문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라는 순수하게 논리적으로 일관된 개념에서 특수한 정치적인 이념이 획득될 수 있는가의 여부이며,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일관된 어떤 개인주의에도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치권력과 국가형태에 대한 불신의 정치적 실천으로 이끌지만 결코 독자적인 적극적 국가이론과 정치이론에로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p.94)



홉스를 연구한 레오 스트라우스에 의하면 슈미트의 과제는 자유주의의 좌절이라는 사실로 인해 생겨난다.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부정했지만, 그로써 정치적인 것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은폐했을 뿐이다. 자유주의는 반정치적인 담론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정치적인 것을 말살해 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이해를, 정치적인 것에 대한 솔직한 태도를 말살해 버린 것이다.(p.191)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현상을 구명하는 데 있어 자유주의적 해답의 부조리를 논증함으로써 정치의 일반개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근본적인 해답을 내릴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그러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 스스로도 정치(적인 것)에 완전무결한 정의를 내리는 것을 단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ㅡ 그가 내린 확실한 것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이 관점을 설명할 때는 오로지 적을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만 서술하게 되기도 한다). 스트라우스가 홉스를 연구했다는 것의 약간의 이점이라면, 홉스에게 자연 상태는 개개의 인간의 전쟁 상태이지만 슈미트에게 있어 자연 상태는 집단들의 전쟁 상태라는 것이다. 홉스가 정치적인 것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자연 상태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기에 그렇다. ……슈미트는 일단, 상황의 유동성, 예외(위기)적 상황, 비관적 역사관과 인간관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명제들이 슈미트에게서만 나타난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이를테면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에 대한 정의는 꽤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적과 동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라. 「적과 동지의 구별이 우발적으로도 있을 수 없게 된다면 거기에는 단지 정치와 무관한 세계관, 문화, 문명, 경제, 도덕, 법, 예술, 오락 등만이 존재하며, 정치도 국가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ㅡ 스트라우스는 '오락'이라는 말에 주목하고 있지만 그것은 차치하도록 한다(너무 깊다). 그러니까 슈미트는, 정치 없는 세계의 흥미로움 ㅡ 이 '흥미로움'의 존재 가능성이 있다면 ㅡ 에 대해 일말의 의심은 가지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그런 상태를 혐오함으로써 결국 정치적인 것을 인정하고야 만다.